한국 미술/한국 미술사
[살롱 드 경성] “까치머리 이상, 꼽추 구본웅이 걸어가면 곡마단 온 줄 알고 환호했다”
주해
2022. 12. 4. 11:20
2021-02-27 10:06:42
① 이상, 구본웅, 박태원의 우정.....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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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머리 이상, 꼽추 구본웅이 걸어가면 곡마단 온 줄 알고 환호했다”
까치머리 이상, 꼽추 구본웅이 걸어가면 곡마단 온 줄 알고 환호했다 아무튼, 주말 살롱 드 경성 ① 이상, 구본웅, 박태원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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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는 혹독했으나 문학과 예술은 꽃피었다. 20세기 초반 온 세계가 사상 철학 문예 생활방식까지 빠른 속도로 변화하며 문화적 충격을 흡수하고 튕겨내야 했던 역동의 시대였다. 나라 잃은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 지성인들은 유토피아적 안식처를 찾아 문학과 예술의 가치에 헌신했다. 시와 그림, 소설과 철학에 두루 능한 ‘경성의 천재들’이 태어났다. 이상과 구본웅, 백석과 정현웅, 김기림과 이여성, 이태준과 김용준, 구상과 이중섭 등 천재들은 서로 우정을 나누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암흑기 르네상스를 일궈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경성 시대의 문학과 예술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교과서에서 그들의 이름과 삶을 단편적으로 들었을 뿐이다. 조선일보와 함께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를 히트시킨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이 그 시대 이야기를 들려준다. 경성 천재들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사랑을 근현대 명작들과 더불어 만끽할 수 있는 ‘천일야화’다.
구본웅이 1935년 발표한 ‘친구의 초상’. 이상의 얼굴로 붉은 눈자위 등 병색이 짙은 시인의 모습을 표현했다.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승만이 그린 ‘이상과 구본웅’. 까치집 머리, 털북숭이 수염의 이상과 작은 키에 질질 끌리는 외투를 입은 구본웅의 기묘한 조화가 곡마단 행차에 비유됐다.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구본웅의 ‘인형이 있는 정물’(1937).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에 걸려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상(왼쪽), 박태원(가운데), 김소운이 함께 찍은 사진.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시인 조병화가 그린 1950년대 명동다방 지도.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 작품은 5년 전 홍익대 미대 입시 면접 문제로 나왔다.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화가 구본웅이 친구인 이상 시인을 그린 작품이다. 어릴 때부터 나를 따라 미술관을 자주 다녔던 조카는 시험에서 작가와 작품 제목을 서슴없이 말했는데, 면접관들은 이 작품이 뭔지 정확히 말한 학생은 오늘 처음이었다며 그 자리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내 조카는 물론 합격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이 ‘유명한’ 작품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작가 ‘구본웅’에 대해서, 그리고 구본웅과 시인 이상의 우정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구본웅은 1906년 서울에서 천도교인(손병희 교주의 비서)이자 잡지 ‘개벽’ 편집장을 지낸 출판인이며, 사업가이고 재력가였던 구자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구본웅은 동네 젖동냥으로 컸는데, 세 살 때 유모가 아이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척추 장애인(일명 꼽추)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구전(口傳)은 의학적 신빙성이 낮다. 아마도 선천적 척추 질환이 세 살 이후 발현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산후통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부친 구자혁은 새 아내를 맞았는데, 그가 바로 ‘변동림'의 언니였다. 나중에 이상의 아내가 되고, 또한 이상이 죽고 난 후 이름을 ‘김향안’으로 고쳐 김환기와 재혼하는 그 변동림 말이다.
◇이상과 구본웅의 동병상련
구본웅은 친어머니가 안 계셨고, 이상은 백부의 손에 컸으니 같은 동네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이 둘이 금방 친해진 것은 ‘동병상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둘 다 매우 똑똑하여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이상은 명문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진학한 반면, 구본웅은 ‘신체적 결함’을 이유로 경성고등보통학교로의 입학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구본웅은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집안의 전폭적인 지지로 ‘화가’가 되어도, 무엇을 해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얻어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구본웅이 일본 대학에서 미술 이론을, 태평양미술학교에서 미술 실기를 공부하고, 이과전, 독립전 등 당대 일본의 재야 그룹전에 당당히 이름을 알린 후 귀국했을 때가 1933년이다. 그리고 이상이 도쿄로 떠나는 1936년까지, 그 짧은 3년간의 시기에 이 둘은 늘 함께 붙어 다녔다. “텁수룩한 머리와 창백한 얼굴에 숱한 수염이 뻗친 이상”과 “꼽추인 데다가 땅에 끌리는 인바네스를 입은 구본웅”이 함께 거리를 거닐면 곡마단이 온 줄 알고 아이들이 뒤를 따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후에 행인 이승만(월탄 박종화의 유명한 역사 소설을 거의 모조리 그린 삽화가)이 이들의 모습을 추억하며 삽화를 그리기도 했으니까.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리다
이 시기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이상의 자전적 단편소설 <봉별기>에 따르면, 1933년 3월 이상은 처음 각혈을 했다. 그 후 총독부 기수직 자리를 그만두고 배천 온천으로 요양 갔을 때, 소설 속에서 그를 찾아왔던 ‘화가 K’가 바로 구본웅이다. 이 둘은 여기서 기생 금홍이를 만났고, 서울로 돌아와서 이상은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렸다.
박태원이 조선일보 1939년 2월 22일 자에 쓰고 그린 ‘자작자화 유모어 콩트 제비’. 파산한 이상의 다방 경영 상태를 보여주는 삽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