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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케이는 왜 모던 보이,모던 걸의 우상이 됐을까
주해
2023. 1. 28. 15:45
엘렌 케이는 왜 모던 보이,모던 걸의 우상이 됐을까
[모던 경성]엘렌 케이는 왜 모던 보이,모던 걸의 우상이 됐을까
모던 경성엘렌 케이는 왜 모던 보이,모던 걸의 우상이 됐을까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연애의 자유내건 스웨덴 작가, 이광수 무정 주인공도 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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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자유’내건 스웨덴 작가, 이광수 ‘무정’ 주인공도 흠모
엘렌 케이는 20세기 전반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젊은이들을 매료시킨 '연애의 자유'를 주창했다. 영육일치의 연애관을 내건 엘렌 케이는 독립적 인격을 갖춘 남녀의 연애로 결혼이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1910년의 엘렌 케이./위키피디아
‘21세 청춘 8개월된 임부, 3세여아를 업고 대동강에 자살’(조선일보 1925년8월5일)
석간 1면에 이런 기사가 났다. 을축대홍수가 나던 1925년 8월2일 밤10시, 평양 선교리 99번지에 살던 정애용은 대문을 나섰다. 제목과 달리, 기사엔 세살배기 장손을 업고 나왔다고 썼다. 가족에겐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밤새 행방이 묘연한 아내와 아들을 기다리던 남편은 모자의 시신이 대동강변에 떠밀려왔다는 전갈을 받았다. ‘의문의 죽엄!생활난이냐? 정신의 이상이냐? 가정 불화이냐?’ 기사는 의문을 남기고 끝난다.
죽음을 선택한 스물한살 여성을 놓고 이 기사는 ‘엘렌 케이냐 코론타이냐?’하고 묻는다. 엘렌 케이(Ellen Key, 1849~1926)는 연애의 자유를 주창한 스웨덴 여성학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는 ‘붉은 사랑’을 내건 소련 사회주의 혁명가였다. 100년 전 신문 기사에 불쑥 등장할 만큼, 이 둘은 당시 지식층 사이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무정’ 주인공 형식의 필독서, 엘렌 케이 전기
한국의 첫 근대소설 ‘무정’에도 엘렌 케이가 등장한다. 춘원 이광수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무정’ 남자 주인공 형식의 독서 목록에서다.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경성학교 영어교사인 형식은 조선에서 가장 진보한 사상을 가진 선각자라고 자부한다. 그런 형식의 독서목록 중 루소 ‘참회록’, 셰익스피어 ‘햄릿’, 괴테 ‘파우스트’와 함께 엘렌 케이 전기가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다. 모던 보이, 신여성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상식’으로 엘렌 케이가 간주된 셈이다.
◇동아시아에서 환영받은 엘렌 케이
엘렌 케이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서 ‘연애(戀愛)의 시대’를 열어젖힌 여성학자다. 존망의 위기속, 생존을 위해 근대화를 모색하던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전통적 구질서에서 개인을 해방시켜 근대적 주체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띈 것이 엘렌 케이였다. 1903년 출간된 케이의 대표작 ‘연애와 결혼’은 이듬해 독일어본을 시작으로 1911년 영어본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됐다. 일본에선 1919년 신조(新潮)사에서 영어본을 토대로 한 번역본이 나왔고, 중국도 1923년 영문판에 근거한 번역본이 나와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 유학생과 신문, 잡지를 통해 케이가 조선에서도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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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남녀가 공원을 거닐고 있는 모습. 1920년대는 연애의 시대였다.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조선일보 1928년4월4일자에 그린 '봄1-무언극'
◇'연애없는 결혼은 부도덕’
‘연애는 결혼의 중심’’부인운동의 선각자로 유명한 여류사상가’. 조선일보는 1925년 ‘역사상에 이름난 여성’ 26회에서 엘렌 케이를 소개했다. 나이팅게일, 퀴리 부인, 빅토리아 여왕은 물론 맹자 어머니, 마르크스 아내까지 32명을 연재한 기획이었다. ‘그의 나이 오십세 될때까지 교육에 종사하다가 그후로 부인 문제, 사회개조에 입과 붓을 아울러 힘썼으니 근대에 드문 여류사상가로 얻기 어려운 ‘생명의 사도’라 일컬을 만하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조선여성동우회, 근우회 창립에 앞장선 박원희(朴元熙·1897~1928)는 1926년 초 엘렌 케이의 연애관을 소개하는 글을 기고했다. ‘연애는 결혼의 중심이올시다. 연애없는 결혼은 실로 아무 의미가 없으니 아무리 법률상 수속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는 진정한 부부가 아니요, 따라서 부도덕한 결혼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이와 반대로 하등의 표면적 조건이 없더라도 연애를 중심으로 한 남녀의 공동생활은 훌륭한 도덕적 결혼이라 하겠습니다.’(‘諸家의 연애관’續, 조선일보 1926년1월16일)
남녀 불문, 부모가 배필을 정하는 결혼이 만연하던 시절, ‘연애 없는 결혼은 부도덕한 결혼’이라고 단정한 케이의 주장은 말 그대로 혁명적이었다. 케이는 조혼(早婚)에 반대했다. 모던 보이들도 대부분 어릴 때 집안 간 약속으로 이뤄진 결혼을 한 경우가 많았다. 케이의 연애론에 남녀 모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대동강에 뛰어든 모자의 사연을 소개한 조선일보 1925년 8월4일자. 아래쪽에 '엘렌 케이'란 이름이 나온다.
◇'영육일치의 연애관’
엘렌 케이의 연애관은 ‘영육(靈肉 )일치의 연애관’으로 요약된다. 연애는 독립적 인격을 갖춘 자유로운 남녀의 정신적, 육체적 결합이라는 것이다. 성적 방종을 하는 자유연애(Free love)와는 엄격히 구분되는 연애의 자유를 주창했다. 자유롭게 연애한 상대와만 결혼할 수있고, 성숙하지 않은 어린 남녀가 지나치게 일찍 결혼하는 것은 비합법적이라고 했다.
케이는 우수한 아동의 출산과 양육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한다면서 아동을 양육하는 어머니의 역할, 모성에 영향을 미치는 결혼을 포함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우수한 아동의 출산에 미치는 양성 관계의 개선에 관심을 기울였다.조혼을 반대한 이유중 하나도 아동을 제대로 양육하기에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케이를 모성(母性)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이유다.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를 찾아 스웨덴에 유학한 최영숙의 사연을 소개한 조선일보 1928년4월10일 '엘렌케이 찾아가 서전 있는 최영숙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