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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 비밀문서 공개로 밝혀진 쿠바 미사일 사건의 결정적 순간.....흐루쇼프의 깨끗한 斷念과 케네디의 신중함이 인류를 구했다
주해
2023. 5. 30. 08:32
최근 러시아 비밀문서 공개로 밝혀진 쿠바 미사일 사건의 결정적 순간 : 월간조선 (chosun.com)
최근 러시아 비밀문서 공개로 밝혀진 쿠바 미사일 사건의 결정적 순간
흐루쇼프의 깨끗한 斷念과 케네디의 신중함이 인류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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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 실패의 교훈 잊은 푸틴, 위기 때 핵 쓸지도
⊙ 미국이 쿠바 침공했으면 현지 소련군은 핵으로 반격했을 것
⊙ 군지휘관들이 정치인들의 핵 사용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것은 착각
⊙ 미사일을 숨길 야자수 숲은 없었다… 은폐 불가능하다는 보고는 차단
1962년 6월 3일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미 문서기록청
1962년 7월,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미사일 부대 사단장 이고르 스타첸코(당시 43세)는 쿠바의 중서부 상공을 비행하는 헬기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큰일 났다”는 생각을 했다. 7주 전, 그의 상관인 소련 전략미사일군 사령관 세르게이 비류조프가 농업 전문가로 위장하여 쿠바를 방문, 피델 카스트로 수상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소련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이런 보고를 했던 것이다.
“쿠바의 야자수 숲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면 발각되지 않습니다.”
스타첸코가 헬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딴판이었다. 미사일 기지 건설 후보지엔 야자수가 15m 간격으로 드문드문 서 있는 데다가 숲 면적도 부지의 16분의 1에 불과하여 150km 북쪽에 있는 미국의 공중정찰부대로부터 미사일을 숨길 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문제는 스타첸코 장군의 이런 보고가 소련군의 관료주의에 걸려 흐루쇼프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흐루쇼프는, 핵탄두 탑재 미사일을 미국 몰래 쿠바에 배치, 협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인류의 생존이 걸린 위험한 도박을 밀어붙이게 된다. 이는 그 자신의 정치적 생명도 끝장낸 운명적 결정이었다.
1962년 10월 미국의 U-2 정찰기는 미사일 발사대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은 이틀 뒤 존 F. 케네디 대통령 책상 위에 올라갔다. 대통령은 전문가 회의를 소집, 며칠 동안 격론을 벌였다. 폭격, 침공 등 강경론을 누른 케네디는 ‘해상봉쇄’를 선택, 소련에 물러날 시간을 주었다. 흐루쇼프는 즉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퇴로를 모색한다.
케네디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과 주미(駐美) 소련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의 비밀채널을 활용, 흐루쇼프에게 두 가지 약속을 했다.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면 앞으로 쿠바를 무력(武力)침공하지 않는다(공개적 약속), 터키에 배치한 핵미사일을 철수한다(비밀 약속). 흐루쇼프는 이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이는 세계를 구한 운명적 결정이었다. 케네디의 신중함과 흐루쇼프의 깔끔한 단념(斷念)이 인류를 살린 것이다.
핵무기 사용으로 위협하는 푸틴과 김정은, 두 사람을 상대해야 할 바이든과 윤석열 대통령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기사가 미국의 격월간 잡지 《포린 어페어》 5~6월호에 실렸다.
“디테일에 악마가 있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측 비밀자료를 근거로 하여 세르게이 다첸코(존스홉킨스대학 교수)와 블라디슬라브 주보크(런던경제대학 교수)가 같이 쓴 논문의 제목은 〈벼랑의 대실수(Blundering on the Brink)〉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작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일 때 쿠바 미사일 사건 60주년을 맞아 관련 문서의 비밀등급을 해제, 공개했다. 이 문서 공개로 그동안 미국 등 서방세계에서 내놓았던 학설이 부정된 경우도 있다. 두 저자는 이 문서들이 ‘재앙과 평화 사이엔 전략적 사고뿐 아니라 운(運)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핵무기를 둘러싼 긴장 상태에선 예측 불가능한 경우의 수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디테일에 악마가 있다’는 말대로 사소한 것을 그르쳐 전체를 망칠 수도 있다. 민주적 의사 결정을 무시하는 독재자와 그를 둘러싼 관료주의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결과를 낳은 사례가 흐루쇼프가 자신의 무덤을 판 쿠바 미사일 사건이었다.
흐루쇼프는 1962년 5월 독단적으로 쿠바에 소련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심한다. 흐루쇼프는 그해 10월 케네디가 특별 방송을 통하여 해상봉쇄를 선언한다는 통보를 받은 직후 소련 지도층을 소집한 자리에서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미사일 배치의 목적이었다”고 변명했다. 흐루쇼프는 1961년 4월, 케네디 대통령 취임 직후에 있었던 ‘피그만 침공 작전’이 비록 실패했지만, 이는 연습게임이라고 보았다.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이 무너지면 소련과 자신의 권위도 큰 타격을 받을 것이고 이를 중국공산당이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흐루쇼프가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밀어붙이니 공산당과 군대에선 반론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미국의 코밑에 핵미사일을 몰래 배치하는 작전을 소수에 전담시켰다. 흐루쇼프가 국방자문위원회에서 방침을 밝힌 지 사흘 만에 총참모장과 국방장관이 공동서명한 침공계획이 만들어질 정도로 졸속이었다. 약 4만4000명의 군인과 120기의 각종 미사일, IL-28 폭격기 1개 연대, 미그 전투기 1개 대대, 4개 보병 연대, 2개 대공포(對空砲) 사단 등을 선박 편으로 수송하는 일 자체가 보안이 불가능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그래도 흐루쇼프는 비밀 유지가 가능하다고 믿었고 이견(異見)이 제기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공동 책임을 지우기 위하여 당과 군의 지도층 인사들로부터 작전에 동의한다는 서명도 받았다.
異見은 묵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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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 배치도 중 일부. 야자수가 많지 않아 미사일 및 관련 시설들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사진=위키미디어 |
1962년 6월 흐루쇼프는 소련 군사 지도자들과 만났는데 이 자리엔 쿠바 정부를 돕고 있던 군사 고문관 알렉세이 데멘티에프도 참석했다. 그가 “미군 정찰기로부터 미사일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려고 하니 말리노프스키 국방장관이 책상 밑에서 걷어차면서 말문을 막았다. 위에서 밀어붙이니 반대를 해봤자 쓸데없다는 분위기가 깔렸다.
7월 12일 선발대가 쿠바에 도착했다. 미사일 부대 사단장 스타첸코는 미사일 기지로 지정된 장소를 시찰하고 경악했다. 비류조프 사령관의 보고와는 달리 야자수가 숲을 이루긴커녕 듬성듬성 서 있는 데다가 제대로 된 지도(地圖)조차 없고 소련 장교들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면서 통역자를 데려오지도 않았다. 급하게 스페인어 교육부터 받아야 했다. 쿠바 주둔 소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사 플리브 장군은 미사일 설치 장소 변경을 모스크바의 참모본부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거절 이유는 “참모본부의 당초 방침과 어긋난다”였다.
노출된 지역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기 위하여 땅을 팠더니 돌이 나와 고생하고, 전기는 쿠바와 소련의 사용 볼트가 맞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는가 하면, 허리케인 철을 만나 공사가 차질을 빚었다.
이 모두가 흐루쇼프의 독단적 결정을 졸속으로 집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인데 문제는 자체 수정을 불가능하게 만든 공산당식 관료주의였다. 《포린 어페어》 논문 저자(著者)들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 작전에서 같은 실수를 했다고 지적했다. 측근들이 다른 의견을 내지 않은 걸 보면 쿠바 위기로부터 배운 것이 없어 보인다.
쿠바 작전은 물량 면에선 대단한 성공이었다. 7~10월 사이 소련은 85척의 선박으로 흑해-지중해-대서양을 건너 8000대의 차량, 500대의 트레일러, 100대의 트랙터, 3만1000t의 연료, 2만4500t의 식량, 그리고 수많은 항공기와 미사일 등을 실어 날랐다. 소련이 이렇게 무리한 작전을 펴는데 미국이 10월 14일에 가서야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일종의 기적이었다. 미사일 기지 건설에 방해가 되었던 날씨는 미국의 정찰 비행도 방해했다.
핵미사일 발사 준비 완료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 23일 쿠바 봉쇄령에 서명했다. 사진=미 의회도서관 |
CIA는 8월에 대공포가 쿠바에 반입되는 것을 확인하고도 목적에 대하여 오판(誤判)했다. 소련 미사일 기지 보호용인데도 쿠바의 재래식 군사력을 공습으로부터 지키려는 것이라고 추정했다. 존 맥콘 CIA 국장만이 미사일 기지 건설로 보았다. 미국 U-2 정찰기가 2만m 상공에서 쿠바 상공을 비행하다가 소련 미사일 기지 사진을 찍은 것은 1962년 10월 14일이고 그 후 보름간 인류 공멸의 위기가 지속된다.
케네디 대통령이 사회를 본 대책회의에서 해상봉쇄를 택하게 된 이유는 쿠바에 배치된 소련의 핵 투발(投發) 미사일이 발사 가능한 수준인가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핵폭탄이 미사일과 같이 반입되었는지도 불투명했다.
이번에 비밀이 해제되어 밝혀진 바로는 10월 20일에 한 곳의 미사일 기지가 작전 가능하게 되었는데 8기의 미사일을 쏠 수 있었다. 미국의 해상봉쇄가 작동하고 있던 10월 25일에 두 기지가 작전 가능 상태로 전환되었다. 10월 27일 현재 24기의 미사일 발사대가 대기 상태였다. 핵폭탄 저장고와 미사일 기지 사이는 120~500km나 떨어져 있었다. 소련 지도부가 모스크바에서 명령을 내릴 경우, 실제 발사 시간까지는 14~24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위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0월 27일 미사일 부대 스타첸코 사령관은 핵폭탄을 미사일 기지 근방으로 갖다 놓아 10시간 만에 발사할 수 있게 했다.
만약 미국이 소련 미사일 부대의 이런 사정을 알았더라면 전면 공습으로 기지들을 모두 파괴할 수 있었겠지만, 소련과 쿠바의 대응으로 전쟁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그런 공습을 받았을 때 소련군은 쿠바 내의 핵미사일로 미국을 칠 수 있었을까? 《포린 어페어》 논문 저자들은 최근 공개된 자료에 근거하여 이렇게 정리한다.
미국이 침공했다면 핵전쟁으로 갔을 것
쿠바에 들어온 소련군은 미국에 대한 핵 공격 권한을 미리 위임받은 적이 없었다. 발사 명령은 모스크바에서만 내리게 되어 있었다. 미군의 공격을 받는 경우에도 쿠바 주둔 소련군엔 핵으로 대응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 대통령이 해상봉쇄 선언을 한 10월 22~23일 고위 대책회의를 주재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번 작전에서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쿠바 주둔군 사령관 플리브 장군에게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지 않고서는 전술핵이나 전략핵을 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 미군의 침공도 소련군의 핵 발사도 없었다. 만약 미군의 쿠바 침공이 시작되었다면 흐루쇼프는 쿠바 주둔 소련군의 괴멸을 지켜보기만 했을까, 아니면 핵으로 반격하여 미소(美蘇) 핵전쟁으로 확대되었을까? 후자(後者)의 가능성이 높다.
이 논문 저자들은 소련군 지휘관들이 모스크바의 핵 발사 명령에 따랐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미사일 부대 사령관 스타첸코 장군도 나중에 “공산당과 소련 정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썼다. 저자들은 군 지휘관들이 정치인들의 핵 사용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란 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푸틴이나 김정은이 핵 발사 명령을 내릴 때 말릴 사람이 없을 것이란 이야기로 들린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누가 먼저 권총을 뽑느냐로 승부가 결정되는 서부 영화의 결투 장면을 연상시킨다.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미국과 소련은 미사일, 전폭기 등 핵 투발 수단을 총동원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작은 사고가 순식간에 핵전쟁으로 커질 수 있는 긴장 속에서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강경론을 누르고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지도력에 치명상을 입은 흐루쇼프가 부하들의 경멸 섞인 눈초리를 의식하면서도 패배를 받아들이기로 한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이 패배로 그는 2년 뒤 궁정 쿠데타를 자초, 실각한다.
핵으로 선제공격해달라 한 카스트로
1962년 10월 25일 봉쇄선 인근으로 접근하는 소련 잠수함을 미 해군 정찰기가 감시하고 있다. 사진=미 해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