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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나 죽으면 눈알을 빼서 문루에 걸어라. 망국 꼬라지를 보리라"
주해
2022. 11. 26. 16:03
2020.05.26 10:57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26/2020052600003.html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나 죽으면 눈알을 빼서 문루에 걸어라. 망국 꼬라지를 보리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나 죽으면 눈알을 빼서 문루에 걸어라. 망국 꼬라지를 보리라 214 소현세자 부부의 일생 ③강빈의 저주와 김홍욱의 기개 소현세자 사망 두 달 뒤 봉림대군 세자로 책봉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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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강빈의 저주와 김홍욱의 기개
소현세자 사망 두 달 뒤 봉림대군 세자로 책봉
인조, 강빈과 주변 인물 제거… '강빈'은 언급 못 할 금기
효종 5년 극심한 가뭄에 "뭐든 말해도 좋다" 교지
황해감사 김홍욱 "가뭄은 강빈의 恨" 상소
곤장 맞고 죽으며 "내 눈알을 문루에 걸라… 나라 망하는 꼴 보겠다"
서인 세력, 줄기차게 김홍욱 복권 요구
효종 8년 송시열 상소 "8년 동안 나라 개판 됐다" "김홍욱 복권하라"
서인 협력 필요한 효종 결국 굴복하고 협조
2년 뒤 효종 죽으며 완성된 서인 세상
김홍욱은 훗날 노론 벽파의 정신적 시조
효종이 등극하고 5년째인 1654년 조선에 변괴와 재난이 잇따랐다. 하늘에서는 대낮에 금성이 수시로 나타나 태양처럼 빛을 발했다. 영남에는 붉은 비가 내리고 관동에는 붉은 눈이 내렸다. 홍수로 궁궐 안까지 도랑물이 넘쳐 사람이 숱하게 죽었다. 수백 리를 사이에 두고 가뭄과 홍수가 이어졌다. 그해 칠월칠석 날 황해감사 김홍욱이 보낸 재난 대책 보고서가 조정에 도착했다. 받아든 효종이 이리 말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자를 잡아오라."(1654년 7월 7일 '효종실록') 엿새 뒤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황해감사는 물론 감사 이송에 시간을 지체한 금부도사 이이형까지 고문을 받았다. 사흘 뒤 감사 김홍욱은 곤장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그날 제주에 큰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봉림대군 세자 책봉 회의
1645년 2월 18일 심양을 떠난 소현세자 일행이 서울에 도착했다. 4월 26일 세자가 급사했다. 5월 14일 심양에 있던 둘째 봉림대군이 귀국했다. 그가 아버지 인조에게 인사할 때 금중(禁中·궁궐 안)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보았다. 실록에는 '국본(國本·새로운 세자)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데다 본디 훌륭한 명성이 있어 상이 그에게 뜻을 두고 있다'고 적혀 있다.(1645년 5월 14일 '인조실록')
두 달 뒤인 윤6월 2일 봉림대군이 차기 세자로 전격 결정됐다. 인조는 소현세자 맏아들 석철 대신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리겠다고 했다. 이날 인조는 조정 대신 16명을 출석시키고 회의를 열었다.
인조가 말했다. "원손(元孫)이 자질이 밝지 못하여 결코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다." 원손을 가르치는 스승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가르칠 때 재기가 보였다"(이식) "아직 어려서 잃을 덕망이 없다"(김육) "어린 소년에게서 어찌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나".(이경석) 그러자 인조가 말을 바꿨다. "현명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말한 것이다." 원손 석철은 아홉 살이었다. 똑똑하다고 하면 인조는 어리다고 시비를 걸었다. 어려도 충분하다고 하면 총기가 없다고 대꾸했다. 정해진 결론을 포장하는 무논리였다. 그 무논리에 회의 참석자 16명 전원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에 있는 학주 김홍욱 부부 묘소. 지난달 발생한 산불에 송림(松林)은 누렇게 타고 나뭇가지는 숯덩이가 됐다. 묘소는 타지 않았다. 김홍욱은 가뭄이 극심하던 효종 5년 강빈 옥사 재조사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곤장에 맞아 죽었다. "가뭄 극복을 위해 무슨 말이든 상소하라"는 효종 교지에 따른 상소였다. 김홍욱의 마지막 말은 "(무슨 말이든 수용한다는 교지에 따라 상소한) 내가 죽으면 내 눈알을 파내 문루에 걸라"였다. "죽어서도 나라 망하는 꼬라지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느닷없이 김자점이 끼어들었다. "깊고 원대한 성상 생각에서 나온 뜻이니 미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조는 "그 말이 옳다"며 크게 기뻐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노라." 김자점이 기다렸다는 듯이 "승전(承傳·비서)을 받들까요?"라고 하니 좌우에서 모두 속으로 웃었다. 실록 사관은 이들을 '임금 뜻을 미리 알아 비위를 맞추는 소인들'이라고 불렀다.(1645년 윤6월 2일 '인조실록') 그렇게 봉림대군은 세자가 되었고 4년 뒤 봄날 왕이 되었다. 이날 어전회의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대표적인 아첨배 회합이었다.
금지된 이름, 강빈
그날부터 그해 9월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기까지 석 달 동안 강빈의 남자 형제 4명은 제주, 진도, 흡곡(歙谷·강원도 통천), 평해(경상도 울진)로 뿔뿔이 유배형을 받았다. 강빈을 시중하던 궁녀들도 귀양을 가거나 맞아 죽었다. 강빈은 인조가 먹을 전복에 독을 집어넣고, 무속을 끌어들여 인조를 저주한 혐의를 받았다. 임금 수라상에 어떤 방식으로 독을 넣었는지는 아무도 밝히지 못했다.
이듬해 2월 강빈이 사약을 받았다. 이후 재조사에 들어간 강빈 사건에서 추가로 처형된 사람은 애순, 가음금, 복기, 돌쇠, 옥남, 끝덕, 끝향, 자근춘, 자근개, 종생, 순례, 최득립, 종례, 예옥 14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불복하고 죽었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인조가 말했다. "지난해 강빈 무리가 곤장 맞고 죽은 뒤로는 환절기면 으레 아프던 증세가 재발하지 않아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1647년 4월 25일 '인조실록') 손자 셋은 모두 제주도로 쫓아버렸다. 두 아이는 거기서 죽었다. 이후 강빈 사건은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금기가 되었다.
효종의 즉위와 서인들의 반격
강빈은 인조가 낙점한 남인 윤의립의 딸을 배척하고 서인이 실질적으로 간택한 세자빈이었다. 선친 강석기는 율곡 이이의 수제자로 서인(西人) 혈통을 만든 사계 김장생 문인이었다.〈2020년 5월 19일 '땅의 역사' 참조〉 궁궐에 진동하는 피비린내와 간신 김자점 혓바닥이 침묵을 불렀지만, 서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재위 3년째인 1652년 4월 26일 부교리 민정중이 상소를 올렸다. 효종이 내린 교지에 답하는 상소다. 국왕이 의견을 수렴하는 교지에 답하는 상소를 '응지상소(應旨上疏)'라 한다. 응지상소자에겐 면책특권이 부여된다. 민정중은 "형제 인륜을 위해 강역(姜逆·역적 강빈) 사건을 재조사하라"고 했다. 효종은 민정중을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중죄를 면하기 어려우나 내가 구언(求言)을 했으므로 용서한다." 강빈이 신원되면 제주에서 살아남은 막내 조카 석견과 왕권 다툼이 벌어질 위험이 있었다. 두 달 뒤 효종은 두 번 다시 강빈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엄명했다.(1652년 6월 3일 '효종실록')
넉 달 뒤 승정원 승지 겸 참찬관이 왕에게 이리 말했다. "성상께서 화가 나시면 지나칠 때가 많다. 말에 난 흠은 고칠 수 없으니 분노에 대해 더 노력하시라." 이 간 큰 승지가 김홍욱이다.
황해 감사 김홍욱의 죽음
1654년 조선에 큰 가뭄이 들었다. 효종은 전국에 교지를 내리고 재난 극복 대책을 물었다. 효종은 "말이 거칠거나 참람하더라도 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효종릉 영릉(寧陵).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과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