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점을 갤러리로 바꾸고… ‘미술계 황제’가 된 남자
고서점을 갤러리로 바꾸고… ‘미술계 황제’가 된 남자
고서점을 갤러리로 바꾸고 미술계 황제가 된 남자 아무튼, 주말 최은주의 컬렉터&컬렉션 스위스 전설적 畵商 에른스트 바이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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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바젤을 찾아간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젤 태생의 전설적 화상 에른스트 바이엘러(Ernst Beyeler·1921~2010)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그의 세계 최고급 컬렉션을 빌려오기 위해서였다. 그가 숨을 거두기 1년 전이었다. 어렵사리 면담이 잡혔다. 많이 말랐지만 키가 크고 꼿꼿한 남자가 걸어왔다. 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따뜻하지만 상대를 압도하는 눈. 아, 저 눈빛으로 수많은 거장을 바라봤겠구나. 창작의 영역에만 거장이 있는 게 아니로구나.
매년 봄이 되면 전 세계 미술계는 바젤에 시선을 집중한다. 6월에 열리는 세계 최고 미술 장터 ‘아트 바젤’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으로 자연스레 눈길을 옮긴다. 세잔·고흐·로댕·피카소·마티스·칸딘스키·몬드리안 등 근대 명작과 프랜시스 베이컨·루이스 부르주아·앤디 워홀·로이 리히텐슈타인·게르하르트 리히터 등 현대 미술의 천재들이 빚어낸 개성 넘치는 작품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중심에 생전 ‘미술계 황제’로 불린 이 남자가 있다.
◇고서점에서 시작된 전설
생전의 바이엘러 부부. /바이엘러 재단
‘바이엘러 컬렉션’의 가치는 스위스 경제지 빌란츠에 따르면 약 18억5000만달러(약 2조6515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이런 비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바젤 대학에서 경제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며 골동품 서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을 따름이니까.
서점 주인이었던 오스카 슐로스(Oskar Schloss)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나치에게 재산을 빼앗긴 뒤 스위스로 도망쳐 서점으로 생계를 꾸렸는데, 영업이 끝난 저녁 슐로스는 직원들에게 문학·철학·예술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1945년 갑자기 작고한다. 이때 바이엘러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렸다. 서점을 인수한 것이다. 함께 일하던, 훗날 평생의 반려자가 된 힐디 바이엘러(1922~2008)의 돈을 일부 빌려서.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1920년작 ‘자화상’. /©Succession Alberto Giacometti/ProLitteris, Zurich
바이엘러 부부는 1952년 서점을 ‘갤러리 바이엘러’로 바꿔 미술품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일본 목판화 전시를 시작으로 400여 전시를 기획하며 감각과 배짱을 키워 나갔다. 2007년에는 한국인 화가 도윤희(64)가 아시아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작은 화랑 주인에서 체급이 확 달라질 결정적 계기는 1960년에 찾아왔다. 미국의 기업인이자 컬렉터였던 데이비드 톰슨의 소장품 수십 점을 독일 뒤셀도르프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관이 매입할 수 있도록 중재한 것이다. 이후 톰슨은 그가 지니고 있던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 70점 전량을 바이엘러에게 팔았고, 바이엘러는 이 작품을 취리히 미술관과 바젤 미술관 등에 재소장시켰다. 이름값은 이제 완전히 달라졌다.
◇세계 최대 미술 장터 일구다
지난해 바젤 시내에서 '아트 바젤' 개막을 알리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아트 바젤
1970년, 바젤은 도시의 위상이 달라질 전환기를 맞게 된다. 바젤의 갤러리스트였던 트루디 브루크너(Trudi Bruckner), 발츠 힐트(Balz Hilt), 그리고 에른스트 바이엘러가 의기투합했기 때문이다. 예술가, 수집가, 갤러리스트가 매년 한자리에 모여 현대 미술을 홍보하고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자는 포부. 아트 페어 브랜드 ‘아트 바젤’의 탄생. 첫 회에 10국에서 갤러리 90곳이 참여했고 방문객 1만6000여 명을 모았다. 이제는 작가와 갤러리스트뿐 아니라 각국의 주요 미술관 관장, 큐레이터, 저널리스트, 비평가들이 모여 미술 정보를 습득하고 동향을 파악하는 축제의 장이 됐다. 석 달 뒤 열릴 올해 아트 바젤에는 세계 최고급 화랑 200곳과 작가 4000여 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아트 페어의 원형적 모델을 제공한 ‘아트 바젤’은 본거지인 바젤(6월)을 비롯해 홍콩(3월)·파리(10월)·마이애미(12월)로도 확장했다. 1년 내내 아트 바젤이 세계 미술 시장에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재작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아트 바젤 파리’ 개막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작품 한 점에 50억, 100억, 200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놀라운 거래 현장에는 전(前) 북한 주재 스위스 대사를 지낸 컬렉터 울리 지그 등 세계적 컬렉터들도 자주 목격됐다. 바야흐로 ‘바젤’이라는 이름이 스위스를 넘어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브랜드가 된 것이다.
◇“영혼의 먼지 씻어주는 예술”
파블로 피카소 1907년작 '여인'. 에른스트 바이엘러의 아내 힐디가 가장 아꼈던 그림이다. /©Succession Picasso/ProLitteris, Zurich
그는 화랑을 운영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중 하나는 작품이 판매될 때마다 새 작품을 2점씩 추가로 구매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 덕에 ‘바이엘러 컬렉션’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97년 부부는 그들의 오랜 꿈이었던 미술관을 개관한다. 1982년 재단을 설립했으나 자신들의 컬렉션을 공개할 마땅한 장소를 갖지 못했던 아쉬움을 비로소 해소한 것이다. 평생을 바친 초호화 컬렉션을 대중에 공개하면서 바이엘러는 벅찬 심경을 그의 오랜 친구 파블로 피카소의 말을 빌려 표현했다. “예술은 우리의 영혼을 일상의 먼지로부터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입니다.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열정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젊은 세대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클로드 모네 '수련'(1916~1919). 이 미술관에는 '수련 방'이 따로 마련돼 있다. /바이엘러 재단
여기에는 피카소의 작품 30여 점이 포함돼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피카소 컬렉션 중 하나인 것은 물론이다. 그는 1960년대 이후 피카소 작품 1000점 이상을 판매했고,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다. 신뢰가 두터워 피카소는 1966년 자신의 스튜디오로 바이엘러를 초대하고, 거기 있는 작품 중 아무거나 골라 가져가라고 했을 정도다. 그는 전시회를 위해 45점을 가져갔고, 이후 26점을 구매해 개인 컬렉션에 포함시켰다. 이 중에는 핵심 소장품으로 손꼽히는 1907년작 ‘여인’이 있다. 화려하고 강인한 이목구비의 여성, 피카소가 매료됐던 아프리카 가면과 조각상의 강렬함을 드러내는 그림. 기존 회화를 지배하던 원근법과 자연주의 경계를 허문 큐비즘의 기원이 된 그림. 이 작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는 자명하다. 힐디가 에른스트에게 “만약 이 작품을 팔아버린다면 당신 곁을 떠나겠다”고 추상같은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미술로 도시를 바꾸다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 전경. /바이엘러 재단
한 인터뷰에서 그는 “현대 미술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것은 너무 비싼 편이다”라고 바이엘러는 대답했다. 그래서 미술관은 그의 초호화 컬렉션을 대중에게 활짝 열어주는 아름다운 창(窓)으로 기능하고 있다. 개관 이후 800만명에 가까운 관람객이 찾은 세계적 명소가 됐다.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건축 거장 렌조 피아노는 바이엘러의 성품처럼 예술품이 그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고양되는 미술관을 디자인했다. 실내 공간은 자연광을 충분히 흡수해 밝고 여유롭다. 미술관의 외양은 과시적이지 않고 정원의 평화로움을 묵묵히 받아내는 겸손함을 지니고 있다. 예술품을 예술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과도 공유하고자 했던 열정적인 예술 지상주의자. 바이엘러는 그의 생이 마지막 시간에 다다랐을 즈음에도 자전거를 타고 미술관에 출근해 관람객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작품을 보고 도록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 정원에 설치된 알렉산더 칼더의 조각 ‘나무’(1966). /©Calder Foundation, New York/ProLitteris, Zuri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