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된 손자 몸값까지 흥정한 구두쇠… ‘미술 낙원’을 남겼다
미술관에 가려면 트램을 타야 했다. 굽이굽이 산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어둑해진 겨울 저녁, 지구에서 가장 부유했던 사내의 미술관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전등 장식으로 빛나고 있었다. 과연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미술관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광경이었다.
미국 LA를 대표하는 게티 센터(Getty Center). 보름 전 출장차 방문한 이곳은, 미국 석유 재벌 J 폴 게티(1892~1976)가 남긴 거대한 유산이다. 주식과 부동산 등으로 약 7억달러의 자금을 재단에 넘겼고, 이 돈이 미술관 건립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인생 역정을 잠깐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석유 재벌, 짠돌이의 지독한 집착
생전의 J 폴 게티.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재산을 소유했고, 결혼도 다섯 번이나 했다. /게티 센터
1957년 미국 최고 부자로 선정됐고, 1966년에는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부자로 등재된 폴 게티는 유명한 일화를 여럿 남겼다. 대부분 그가 얼마나 돈에 집착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양복이든 셔츠든 다 해진 소매까지 수선해 입었고, 세탁비가 아까워 양말도 스스로 빨았으며, 집에 찾아온 손님들 탓에 전화비가 많이 나오자 야외에 동전 전화기(요금은 방문자 부담)를 설치했다는 그런 이야기들. 이 정도라면 부자의 투철한 절약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73년 일어난 손자 납치 사건에서 보여준 면모는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이를 소재로 ‘올 더 머니(All The Money)’라는 영화가 제작돼 2018년 개봉하기도 했다. 폴 게티가 주력한 건 손자의 구출이 아니라 몸값을 대폭 낮추는 것이었고, 그 ‘투자금’에 대한 소득공제까지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납치 당시 16세였던 존 폴 게티 3세는 그때 겪은 충격과 후유증으로 술과 마약에 빠졌고 이후 뇌경색까지 겪으며 54세의 짧은 삶을 마쳤다.
얼마나 돈이 많았는지 “돈을 셀 수 있다면 진정한 부자가 아니다”라는 명언까지 남긴 그가 탐닉한 또 다른 대상은 미술품이었다. “돈을 뜯어내려 거짓말하는 인간들과 달리 미술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 첫 수집품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반 고엔(Jan Van Goyen)의 풍경화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그가 이 작품을 대공황 직후 구매했다는 점이다. 대공황의 여파로 미술품 가격이 폭락했는데 폴 게티는 이 상황을 절호의 기회로 여겼던 것이다. “모든 것에는 제값이 있고 그걸 알아내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세계적 미술관, 입장료는 공짜
하늘에서 바라본 게티 센터 전경. /게티 리서치 인스티튜트
그렇게 폴 게티는 그리스·로마, 에트루리아 조각상부터 중세 필사본, 르네상스 회화 및 조각, 인상주의 명작과 스티글리츠·만 레이·에드워드 웨스턴 등의 근현대 사진까지 광범위하게 사 모았다. 그는 예술품에 집요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안목에 대해서도 스스로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1954년 예술품 수집 및 전시를 위한 재단을 설립했고, 1960년대 중반부터 자신이 살던 빌라 등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활용했다.
수만 점에 달하는 소장품은 더 큰 공간을 필요로 했다. 폴 게티 사후, 재단은 1983년 샌타모니카 산맥 남부의 언덕에 85만평 넘는 땅을 매입했고, 이듬해 ‘백색의 건축가’로 잘 알려진 리처드 마이어(90)에게 일을 맡겼다. 시간과 예산에 제한이 없는 프로젝트. 그 덕에 리처드 마이어는 게티 센터를 그의 건축 인생의 기념비적 걸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활용하는 건축가답게, 일대의 산맥과 태평양을 동시에 조망하고 도시의 풍정을 함께 품어내기 위해 미술관 위치를 산 중턱까지 끌어 올렸다. 이탈리아 티볼리에서 직접 공수해 온 트래버틴(Travertine) 석재로 외벽을 마감했다. 종종 나뭇잎이나 조개 화석 형상이 석재에서 드러나곤 하는데, 가장 자연적인 질감까지 살려내려는 노력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한 해 200만명 이상이 찾는 LA 최고의 명소. 트램을 타고 올라오는 동안 관람객들은 게티 센터의 위용에 놀라게 된다. 또 놀라운 사실은 입장료가 공짜라는 것. 사전 예약은 해야 한다.
◇반 고흐, 클로드 모네… 걸작의 향연
빈센트 반 고흐가 1889년 정신병원 정원에서 발견한 붓꽃을 화폭에 옮긴 ‘아이리스’(74.3×94.3㎝). /게티 센터
미술관은 기획전시관과 동·서·남·북의 소장품 전시관, 총 5군데로 구획돼 있다.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소장품은 웨스트 파빌리온에서 볼 수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아이리스’일 것이다. 게티 재단은 소장품 컬렉션북에서 이 작품을 ‘미술관의 얼굴’로 소개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간 1889년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고흐는 병원 정원에 피어 있던 아이리스(붓꽃)를 화폭에 옮겼다. 극심했던 정신적 고통, 그러나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꽃에서 생명의 힘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의지처럼 꽃잎과 이파리가 춤추듯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화면 속 꽃잎은 파란색이지만, 처음에는 보라색이었다. 이곳 연구원들은 X선 형광 분석법 등을 통해 “안료가 빛에 노출돼 극적으로 퇴색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관련 전시가 다음 달까지 열린다.
클로드 모네가 1891년 완성한 ‘건초더미’(64.8×99.7㎝). /게티 센터
게티 센터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인상주의 명작은 클로드 모네의 ‘건초 더미’(1891). 이 그림의 원제는 ‘건초 더미, 눈의 효과, 아침’이다. 모네는 1890~1891년 건초 더미를 관찰하면서 빛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관찰은 연작으로 이어졌고, 30점 이상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게티 센터가 소장한 그림은 연작이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겨울 아침 그림자를 드리운 건초 더미에서 완숙한 기량에 오른 거장의 붓끝을 살필 수 있다. 게티는 정책상 구매 가격을 공개하지 않지만, LA타임스에 따르면 이 그림은 1989년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개인 수집가에게 850만달러(약 123억원)에 낙찰됐고, 얼마 후 해당 수집가가 게티 측에 작품을 판매했다고 한다.
◇루벤스가 그린 ‘한복 입은 조선 남자’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1617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한복 입은 사내’(38.4×23.5㎝). /게티 센터
서양미술사의 보고(寶庫), 게티 센터의 역할은 계속 확장되는 중이다. 드로잉 컬렉션도 주목할 만하다. 폴 게티 사후 5년 뒤인 1981년 미술관은 렘브란트의 여인 누드 드로잉 한 점을 매입한 것을 계기로 이듬해 드로잉 부서(Department of Drawings)를 개설했고, 현재 약 800점의 드로잉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유럽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루벤스가 1617년쯤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한복을 입은 남자’ 드로잉에 시선을 단박에 빼앗길 것이다. 게티 센터의 해석에 따르면, 이 드로잉은 루벤스가 벨기에 앤트워프에 있는 예수회 의뢰로 제작 예정이었던 제단화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의 기적’ 습작으로 그린 것이라 한다. 다만 “루벤스가 이를 어떻게 접하게 됐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라고 밝혀뒀다.
얼굴에 약간의 붉은 터치를 가미한, 두툼한 두루마기를 입고 말총머리를 한 남자의 초상은 유럽에 전해진 가장 빠른 조선 남자의 초상으로 여겨진다. 이 드로잉을 들여다보면 여러 의문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동방의 은둔국인 조선의 한 남자를 루벤스는 어떻게 알게 됐는지, 과연 이 남자를 루벤스는 어디서 어떻게 만나 관찰했는지, 직접 만나기는 한 것인지, 왜 이 남자가 제단화에 등장하게 됐는지, 당대 아시아 지역의 가톨릭 전도 활동과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 이 드로잉을 게티 재단은 대체 어떻게 입수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