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철학자의 초상화에 이런 뜻이... 알고 보면 더 흥미롭다
유명 철학자의 초상화에 이런 뜻이... 알고 보면 더 흥미롭다
뭉크의 <니체의 초상>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니체의 철학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불안정한 배경과 원색의 색채로 경계에 선 인간의 불안을 표현했다. 니체는 인간을 선과 악으로 규정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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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 <니체의 초상> 1906년퍼블릭 도메인
노르웨이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니체의 초상>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니체가 주장한 인간의 본질적 조건을 담은 듯하다. 언뜻 보기에는 니체라는 철학자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저 평범한 한 점의 초상화로 다가오기에 십상이다. 니체의 저작을 접했거나 하다못해 서양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독일 철학자 니체의 모습이 캔버스 가득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물을 둘러싼 다른 요소들을 살피면 화가가 이 그림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문제의식과 만날 수 있다. 주변의 사물이 굴절된 모습으로 휘청거린다. 땅도 하늘도 온통 휘어져 꿈틀대며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뭉크의 대표작이라 할 <절규>의 배경과 상당히 비슷한 분위기다.
노란색·파란색·붉은색·갈색·검은색 등 거의 원색에 가까운 색들이 기본적인 배색의 조화에서 벗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뒤섞여 어지러운 느낌을 주는 점도 비슷하다. 니체가 서 있는 곳도 마찬가지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높은 다리 위다.
경계에 선 인간을 그리다
니체는 다리에 멈춰 서서 난간 아래를 응시한다. 세상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엉켜서 너울거리고 있으니 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인들 어찌 고정된 상태나 단일한 정체성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으랴. 인간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하나의 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인간은 본성이라는 견고한 뼈대를 세울 수 없는, 늘 불안하고 유동적인 존재임을 나타내려는 듯하다. 다리 위의 니체처럼 인간은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혼돈의 상황 속에서, 이쪽과 저쪽 사이의 다리에 서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려는 게 아닐까? 늘 경계에 서서 불안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가는 존재 말이다.
뭉크는 니체와 만나 직접 교류하지는 않았지만, 니체의 사상에 상당 부분 공감하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단순히 둘 다 어릴 때부터 가족의 죽음과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는 현상적인 공통점에 머물지 않는다. 뭉크는 당대의 문학적·철학적 경향에 깊은 관심을 두고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실존주의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을 곁에 두고 여러 차례 읽었다고 한다. 일기에 그의 문장이 곳곳에 인용되어 있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불안·허무 등을 깊이 탐구한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주요 저작을 읽고 여기에서 얻은 영감을 미술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뭉크의 <불안>도 그 일환이다. 그림에서 니체가 서 있는 다리 난간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주위의 풍경과 사물이 서로 뒤섞여 안정을 잃고 있다. 사람들의 눈은 하나같이 초점이 분명하지 않고 표정도 흐려져 있다. 같은 분위기의 사람들이 뒤로 끝없이 이어져서, 경계에 서서 불안을 운명처럼 끌어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을 드러낸다.
뭉크는 니체의 철학에 공감을 품고 있던 화가였기에, 니체 여동생이 독일 라이프치히 극장에서 열리는 니체 관련 연극의 무대 장식을 요청했을 때 흔쾌히 맡았다. 이즈음 두 점의 니체 초상화를 그렸는데 위의 작품은 그중의 하나다. 니체를 상징하는 개념인 '초인'의 굳은 의지와 당당함보다는 경계에 서서 불안을 떠안고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경계의 불안함을 숙명처럼 지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보여준다. 다른 한 점의 초상화도 거의 유사한 분위기임을 고려할 때 의도된 묘사로 보인다. 인간의 본질을 획일화되거나 고정된 경향의 존재로 보지 않았던 니체의 인간관을 회화적으로 반영하여 그리지 않았나 싶다.

▲에드바르 뭉크 <불안> 1894년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