巨匠의 막막했던 20대 시절
‘정자옥(丁子屋) 지하실에다 비야홀을 해보고, 본정서(本町署) 관할에는 40평쯤의 땐스홀을 만들어본다면 돈벌이도 될 모양이니 재미있을 것같고.’
하마터면 한국 최고 화가가 맥줏집이나 댄스홀 사장으로 남을 뻔했다. 스물 일곱 김환기의 청춘(靑春)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여관방에 드러누워 이런저런 공상으로 소일했다.
‘하두 섬생활이 지리하고 울적해서 서울이나 올라가면 소풍도 되겠고 또 그러나 저러나 공교롭게 무슨 방도라도 얻어 붙든다면 그대로 서울에 주저앉아 살아보리라는 쓰도 달도 않은 생각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김환기가 1940년 ‘문장’ 4월호에 쓴 수필 ‘군담’에 나오는 대목이다. 공상끝에 이런 대목도 있다. ‘좋은 조수를 하나 다리고 내 자유껏 짤막한 영화를 꼬옥 한편만 만들어 보았으면’. 화가 대신 봉준호나 박찬욱 같은 영화감독 김환기로 기억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1957년 파리에 머물던 김환기와 아내 김향안. 김환기는 190센티미터의 장신이었다.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스물두살 데뷔작부터 신문에 실려
1935년 일본 이과회 전시에 입선한 김환기의 데뷔작 '종달새 우지질 때'. 데뷔작부터 신문에 실릴 만큼 주목받았다. 조선일보 1935년 10월20일자
김환기는 1937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도쿄나 경성에서 열린 전시회에 더러 작품을 출품해 신문에도 자주 소개될 만큼 주목을 받았다. 스물두살 무렵 일본 이과회(二科會) 전시회에서 입선한 데뷔작 ‘종달새 우지질 때(종달새 노래할 때)’부터 조선일보(1935년10월20일자)에 실렸다. 시골 처녀가 바구니를 이고 가는 장면을 그린 100호짜리 대작으로 지금은 소재를 알 수없는 작품이다. 이듬해 이과전에 입선한 작품 ‘25호실의 기념’도 조선일보(1935년9월25일자)에 실렸다.
김환기는 스물 다섯 무렵까지 그린 작품만 500여점이 될 만큼 이런 저런 실험을 하며 화가로서의 길을 모색했다. 귀국 후 고향인 신안 기좌도에 들어가 작품활동에 전념했던 모양이다. (조선일보 1938년 6월1일, ‘漂渺의 孤島에서 畵想에 沉潤而已’ 파란 부분을 클릭하면 옛날 기사 원문과 현대문을 볼 수있습니다.)
◇주목받는 작가였지만 백수
김환기가 그린 20대의 자화상. 조선일보 1938년 6월1일자에 실렸다
주목받는 젊은 작가였지만 앞길 막막한 백수나 다름없었다. 예술가의 삶은 불확실한데다 당시는 중일전쟁으로 치닫기 시작하던 때였다. 작품을 출품한댔자 그림이 팔릴 리도 없었다. 더구나 김환기는 사실주의와 거리가 먼 추상화(非구상화)를 택했으니 더 그랬다.
고향 섬 생활이 지겨울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글솜씨 뛰어난 그는 신문, 잡지에 기고하고 좌담에도 불려나가는 이름있는 신진작가였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은 ‘김환기가 다닌 니혼(日本)대학 예술학부는 학제가 참신했다’고 소개한다. 문학과 철학, 미술사와 함께 미술 실기를 가르치는 융합교육을 펼친 것이다. 훗날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낸 시인 김기림과 임화, 화가 구본웅과 박고석 등이 니혼대학 예술학부 출신이다. 문청(文靑) 김환기는 조선 문화계의 떠오르는 스타였다.
◇까칠한 평론속 ”이중섭은 우리 화단의 일등 빛나는 존재”
김환기는 조선일보에서 발간하던 월간지 ‘조광’과 ‘여성’, 이태준이 편집주간으로 있던 문예지 ‘문장’에 자주 기고했다. 대중이 어려워하는 추상미술을 당당히 변론하는 글도 신문에 썼다.
‘현대의 전위회화의 그 주류는 추상예술’이라면서 ‘현대에 있어 적어도 추상회화의 출현이란 현대문화사에 한 ‘에포크’가 아니될 수없다. 현하 조선화단에 전위적 회화의 분위기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르되, 적어도 현대예술에 있어서 사상,시대성,의식, 감각, 즉 말하자면 적어도 현대생활의 표현양식 또는 방법이 가장 추상회화에 다분한 특질이 없지 않을까’(조선일보 1939년6월11일 ‘추상주의소론’)
글 잘 쓰는 김환기는 미술 평론도 더러 썼다. 1940년 12월 ‘문장’에 쓴 ‘구하던 1년’도 그 중 하나다. 당대 작가들의 등용문이었던 ‘선전’(鮮展)을 호되게 비판한다. ‘금년의 선전은 정직하게 말하여 그 기술은 나아졌다고 보겠으나 우리들의 감성을 뒤흔들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작가가 作畫하기 이전 ‘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칭찬에 인색했던 이 글에서 그가 극찬한 신예가 있었다. ‘작품 거의 전부가 소를 取題했는데 침착한 색채의 階調, 정확한 대포름, 솔직한 이매ㅡ주 소박한 환희, 좋은 소양을 가진 작가이다.’ 부민관에서 열린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에 출품한 스물 넷 이중섭이었다.
◇巨人국의 신사
1940년 전후 김환기의 경성 생활을 증언하는 자료가 있다. 김환기가 죽첨정(竹添町·충정로)에 있던 도요타 아파트(현 충정아파트)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본미술협회가 1940년 5월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자유미술전’를 개최하면서 발간한 목록이다. 전시에 출품한 김환기는 주소를 ‘경성부 죽첨정 도요타 아파트’로 올렸다. 1937년 8월 준공한 도요타(豊田) 아파트는 4층 규모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당시로선 첨단 건물이었다. 아파트는 단기 체류자도 받는 숙박시설이었다. 이 아파트는 8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주거시설로 사용하고 있다.
또 하나는 190센티미터 가까운 장신의 김환기를 ‘거인국 신사’로 묘사한 글이다. ‘요즈음 종로 네거리를 걸으면 가끔 거인국에서 여행온 듯한 육척 전후의 대단한 두 신사를 만난다. 그중 한 사람은 이미 정평 있는 거구의 임자 길진섭씨여서 자칫하면 화단을 ‘스포츠’단체로 연상시키기 쉬워서 화단으로서는 위험인물이지만 다른 한사람인즉 남해에서 봄바람에 쫓겨 상경한 추상파의 김환기씨인데 길씨보다도 청공에 두각을 나타내기를 수촌을 더한 초거인이다.’ (조선일보 1940년 3월9일 ‘거인국’) 미술계가 문단이나 음악계에 비해 체격이 좋았던 모양이다.
◇조지야 백화점서 개인전
2019년 한국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132억원에 낙찰된 김환기 작 '우주'
김환기가 1950년대 그린 '여인들과 항아리'(281.5x567㎝). 그가 그린 그림 중 가장 크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유족이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중 하나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내년 3월까지 전시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