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0 12:51:24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581887
산을 허물어 수십 개의 고분을 파헤쳐 놓은 듯한 광경, 고령 지산동 44호분 발굴 당시의 모습입니다. 단 한 개의 고분이 이 정도로 컸습니다. 봉분 지름이 27m, 높이는 6m에 달하는 왕릉급 무덤입니다.
지산동 44호분 발굴 장면
무덤 주인이 잠들어 있던 돌방, 그 옆엔 부장품만 따로 모아둔 돌방이 두 개가 더 있었습니다. 안에서는 대가야 고유의 토기와 갑옷, 투구 등 무기, 말갖춤, 장신구, 일본 오키나와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등이 우르르 쏟아졌습니다. 발굴 참가자들을 또 한번 놀라게 한 것은 생생한 순장 현장이었습니다. 무덤 주인이 매장된 돌방을 호위하듯 자그마한 돌덧널 32개가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각각 1~2명의 뼈가 나온 것입니다. 주인공이 묻힌 으뜸돌방과 부장품을 넣는 딸린돌방 두 개에서도 순장자가 발견됐습니다. 사후에도 무덤 주인을 모시기 위한 시종과 창고를 지키는 창고지기인 셈입니다. 이렇게 한 무덤에서 나온 순장자가 40명에 이르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r5No6VV-eM
▲ 44호분 구조와 무덤 내부 (영상=대가야박물관 제공)
인골을 분석해보니 부녀로 보이는 30대 초반 남성과 8살 소녀가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고, 30대 남녀가 함께 매장되기도 했습니다. 순장자 옆에는 말갖춤 유물, 무기류, 장신구, 농기구가 발견됐습니다. 무덤 주인을 모실 마부, 호위 무사, 농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1년이 흘렀습니다. 이번주 초 경북 고령군과 대동문화재연구원은 지산동 일대 고분 74기를 추가로 발굴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부장품 중에는 A구역 2호분에서 나온 금동제 관모와 환두대도의 손잡이가 특히 주목을 끌었습니다. 금동제 관모는 주로 백제 고분에서 출토되고, 잎사귀 모양의 환두대도 장식은 신라 고분에서 많이 나오는 유물입니다. 무덤 양식도 시신을 무덤 옆면을 통해 매장하는 신라식 '앞트기식 돌방무덤'이었습니다. 하나의 무덤 안에 가야와 신라, 백제 문화가 공존하는 것이 확인된 것이죠.
A구역 제2호묘 출토 금동제 관모
A구역 제2호묘 출토 삼엽문 환두대도
A구역 제2호묘 출토 삼엽문 환두대도
A구역 제27호묘 출토 투구
(왼쪽) B구역 제3호묘, (오른쪽) A구역 제27호묘 출토 투구
B구역 제3호묘 전경
B구역 제3호묘 유물 출토상태(마구류)
귀하지 않은 유물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앞서 본 44호분에 비해 너무 빈약해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발굴한 고분은 모두 소형분들입니다. 봉분이 아예 없어서 발굴 전까지는 관람객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던 이동로였습니다. 이 길을 CCTV와 조명용 케이블을 매설하기에 앞서 발굴해봤더니 나온 유물들인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분이 감춰져 있길래 이렇게 간단히(?) 74기나 나왔을까요? 대가야박물관 정동락 학예사는 "지산동에서 육안으로 봉분이 확인돼 고유번호가 매겨진 고분은 현재 704기"라며 "봉분이 없거나 서로 겹쳐진 고분까지 합치면 적어도 1만기, 많으면 2만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고분 수만 놓고 보면 한강 이남에서 최대 규모라는 것입니다. 가야는 고대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부족국가 연맹에 머물렀다고 배워온 우리로선 당황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야 국가들의 운명을 바꾼 일대 사건은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이었습니다. 신라의 구조 요청을 받은 광개토대왕이 5만명의 병사를 낙동강 하구까지 내려 보내 가야와 왜군을 토벌한 사건이었습니다. 고구려 군은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 아라가야의 함안까지 추격해 들어왔고, 이후 신라에 주둔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금관가야는 급격히 쇠퇴했고, 그 대체 세력으로 내륙에 있던 고령의 대가야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대가야가 고구려-신라 연합군에 협조해 세력을 확장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영토가 어디까지 미쳤는지는 수수께끼입니다. 대가야 특유의 토기들이 합천, 함양은 물론 멀리 백두대간 넘어 남원, 진안, 장수 등 전라도 동부 지역에서도 발굴되고 있어서 대가야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가야가 고대 왕국으로 성장했는지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지만 '왕' 칭호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도굴 유물이어서 어느 고분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대가야에서 만든 금관 2개와 '大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고령 향교 자리에서 대가야 당시 궁성 터와 주위를 둘러싼 해자(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앞을 둘러 인공적으로 판 연못)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https://youtu.be/vhhVMjYDjPU
▲ '大王' 명문이 새겨진 토기와 대가야 왕관 (영상=대가야박물관 제공)
다시 지산동 현장으로 가봅니다. 고령군 읍내를 굽어보며 남북으로 흐르는 해발 310m 주산 능선을 따라 수많은 고분들이 봉긋봉긋 일대 장관을 이룹니다.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발굴한 20m 이상 고분은 11기에 불과합니다. 이보다 큰 왕릉급 5기는 일제에 의해 마구 파헤쳐졌습니다. 파헤쳐졌다고 표현하는 것은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겠다며 변변한 발굴보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마구 부장품을 뒤져갔기 때문입니다. 발굴이라기 보단 약탈에 가까웠습니다. 고령군의 한 관계자는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철수하기 직전 고령초등학교 운동장에 트럭 3대분의 엄청난 유물이 실려 있는 것을 본 주민이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지산동 고분 가운데 상당수는 도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20m가 넘는 대형 고분 10여 기가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고, 그보다 작은 1만기가 넘는 고분은 고대 가야의 비밀을 간직한 채 땅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가야의 타임캡슐은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야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정작 밝혀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기록상으로 대가야는 서기 42년 건국돼 562년 신라 진흥왕때 이사부 장군에 의해 멸망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장장 520년간 16명의 왕이 통치한 국가지만 문헌 기록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그래도 각자 역사서를 남겼고, 그 기록의 일부가 삼국사기 등에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반해 가야는 역사서 자체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야를 철의 왕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무덤마다 출토되는 그 많은 덩이쇠가 어디서 생산돼 어떻게 유통됐을까? 수없이 쏟아지는 철제 갑옷과 투구, 가야 국가별로 특색을 보이는 각종 토기들은 또 어디서 누가 제작했을까? 가야금과 우륵으로 대표되는 가야의 예술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 아직 우리는 뚜렷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가야사의 비밀을 밝히는 작업은 1980년대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돼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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