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1 15: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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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金英子.1922∼2015.12.28)
여성 서양화가. 전남 목포 출생. 1935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 우에노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유학파로, 귀국 후 천경자와 함께 한국 여류화단을 이끌었으며, 크로키 분야에서 독보적인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았다.
1953년 광주와 대전에서 첫 개인전을 연 것을 비롯해 60여회의 전국 순회 개인전을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 1984년 광주전시회를 마친 후 목포에 정착, 후배들을 가르쳤고, 예향목포인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고향에서도 목포 예술회관을 무대로 한 토요마당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젊은 시절에는 나무를 즐겨 그렸고 노년에는 농악과 유달산, 삼학도를 주요 소재로 삼는 등 풍경과 풍속을 다뤘다. <농악 시리즈>, <군무>, <탈춤> 등으로 ‘김영자 화풍’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화 크로키도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는 화풍으로 꼽힌다.
1945년 제1회 유화개인전, 제55회 유화개인전(서울 롯대화랑), 서울 롯대백화점 개점 축하개인전, 제65회목포 MBC초대 개인전, 동양최대유화 ‘농악 2000호’(제주 아트랜드 소장), 프랑스 ‘르 살롱전’(1988) 초대작가, 남농 미술대전 심사위원장(2010)을 역임했으며, 호남 최초 여성 서양화가이다
목포시민의상 수상, 전라남도 예술문화상 수상, 한국예술인 총연합회 문화예술대상 등을 수상했다.
【생애】
김영자 화백은 대한민국 화단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그가 걸어온 길은 ‘호남 최초 여성화가’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우리나라 근대 서양화단의 역사로 통한다. 여성화가가 드물던 시절 일본 동경 우에노 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 근대미술을 국내에 소개했다. 한국 최초 여성화가인 나혜석 선생에 이어 동경 우에노 미술학교에 입학한 두번째 한국인이라는 이력만으로도 그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그는 고교생으로서 1938년 화가들의 등용문이었던 17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작품 ‘반찬의 재료’로 입선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출품자들이 호남을 대표하는 화가인 남농 허건(동양화), 박수근(서양화)씨 등 쟁쟁한 인물들이다.
목포 갑부이자 목포시의원을 지낸 김용문 선생의 외동딸이었던 김 화백은 지난 1943년 일본 동경 우에노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자녀 출산 때문에 중퇴한 뒤 귀국길에 올랐으나, 남편이 한국전쟁 때 숨지면서 순탄치 않은 삶을 살게 된다. 김 화백은 이때부터 전국을 떠돌면서 무려 60여 차례 전시회를 여는 등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붓을 잡았다. 그 덕분에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풍경과 풍속화를 주로 그렸던 그는 70, 80년 대 “서양화를 배웠지만 서양을 따르지 않고 한국적인 것을 찾겠다”는 평소 다짐을 실천에 옮겼다. 장터와 산사 등 토속적인 소재를 찾아 헤맸다. 김영자를 대변하는 <농악 시리즈> 등 풍속화는 이런 고민의 결실이다.
그는 오지호, 강용운, 양수아, 배동신 선생 등 광주⋅전남지역을 대표하는 작고 작가들과 교분이 깊었다. 이들의 사랑방은 광주 수기동에 있던 미술연구소로 광주에서 처음으로 생긴 미술학원이었다. 김 화백과 천경자 화백은 경쟁자이자 동지였다. 김 화백 보다 두 살 적은 천 화백은 김영자 화백의 전시회장을 방문한 뒤 “언니는 이쁘니까 그림이 잘 팔리겠네?”라는 뼈있는(?) 농담을 하곤 했다고 한다.
‘김영자 화풍’을 이룬 대가였지만 김 화백의 인생은 곡절 그 자체였다. 남편 박문석씨가 한국전쟁 때 숨진 뒤 또 한 사람과 인연이 됐지만 그는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 화백의 예술을 귀하게 여겼다. 1977년 제주 KAL호텔에서 전시 중인 김 화백의 그림을 때마침 그곳을 방문한 박 전 대통령이 본 게 인연이 됐다. 박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김 화백을 종종 찾았고 자연스럽게 후견인이 됐다.
김 화백은 1980년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목포로 귀향한 뒤 화단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봉사했다. 유달산 꽃축제 대회장을 8년 동안 맡았고 예향목포인연합회장을 지냈다. 후진양성을 위한 김영자 장학회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김 화백은 지난 2013년에는 자신이 아끼던 작품들을 목포에 기증했다. 전남여성 플라자에 있는 [김영자 화백 미술기념관]은 이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는 1922년생으로 여느 화가 같으면 노화 때문에 시력이 떨어져 작업을 할 수 없을 초고령임에도 올 1월까지도 목포 호텔현대에 있는 현대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서는 최근 20여 년 동안 유화 크로키(croquis) 작업을 선보였다. 결국, 이 전시는 생전 마지막 전시로 남게 됐다.
그는 2014년 말 한 인터뷰에서 “‘예술 때문에 자식도 버린 모성애 없고 독한 년’이라 욕 먹으면서도 그림이 싫은 적은 없었다”며 “예술가로서 작업에 고상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겸손해했다.
【작품】 <농악 시리즈> <군무> <탈춤> <장터> <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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