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베네치아… 유영국의 山이 솟았다
베네치아의 유서 깊은 건축물에서 한국의 자연과 중세 고건축 정원이 만났다.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 건물 지상층에 있는 정원 앞 전시실에 한국의 산과 자연을 추상 언어로 그린 유영국의 석판화가 놓였다. /허윤희 기자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유서 깊은 건축물이 강렬한 원색 추상으로 뒤덮였다. 한국의 자연을 닮은 그림 뒤로 중세 고택의 초록 정원이 펼쳐졌고, 관람객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색감에 빨려들어갈 것 같다”며 감탄했다. 세계 최대 미술 축제 베네치아 비엔날레 사전 공개가 시작된 17일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이 유럽의 심장을 흔들었다. “매혹적인 모더니스트”에게 세계 미술계 인사와 외신의 관심이 쏟아지면서 비엔날레의 포문을 여는 전시로 주목받고 있다. 올해 비엔날레는 20일 공식 개막해 7개월간 이어진다.
회화 29점과 석판화 11점, 주요 아카이브 자료들을 선보이는 ‘유영국: 무한세계로의 여정’은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 건물의 3개 층에서 비엔날레 기간 내내 열린다.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이 개최하는 2024 베네치아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로, 유럽에서 열리는 유영국의 첫 개인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국 미술 전문 매체인 아트뉴스가 꼽은 ‘비엔날레 병행 전시 중 꼭 봐야 할 10개 전시’에 선정됐다. 아트뉴스는 “눈부시게 밝고 매혹적이며, 대비되는 색면이 기묘한 조화(strange harmony)를 이루는 작품”이라며 “유영국은 자연을 미니멀리즘으로 표현한 한국 최고의 모더니스트”라고 소개했다.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 3층에 걸린 유영국의 1960년대 전성기 작품들.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날 오후 1시(현지 시각) 열린 개막식 반응도 뜨거웠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구겐하임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영국 테이트모던, 내셔널갤러리, 홍콩 M+ 등 주요 미술관 인사가 몰려들었고, 뉴욕타임스·가디언·CNN·파이낸셜 타임스·르피가로 등 외신들도 경쟁적으로 취재했다.
형·색·면으로 우주의 질서를 표현한 유영국은 고향 울진의 높은 산과 깊은 바다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회화로 표현하면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전시를 더 특별하게 만든 건 공간의 매력이다. 16세기 건축물을 20세기 들어 걸출한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와 마리오 보타가 리모델링해 중세 고건축과 현대 건축 미학이 조화를 이루는 유서 깊은 장소가 됐다. 물과 정원, 돌과 나무 바닥, 유리창 자연광이 과감한 원색과 어울리며 자연성을 극대화했다.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 지상층 입구. 작가 유영국을 소개하는 영상 화면 오른쪽으로 곤돌라가 지나가고 있다.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 무한세계로의 여정' 전시가 시작되는 도입부. 베네치아의 유서 깊은 건축물과 유영국의 강렬한 원색 추상이 멋스럽게 어울린다. /유영국미술문화재단
도입부인 지상층 입구는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안과 밖이 물로 연결된 공간이다. 영상 화면 오른쪽으로 곤돌라가 지나가고, 정원과 맞닿은 전시실엔 한국의 산과 자연을 모티브로 한 석판화가 놓였다. 전시 기획을 맡은 김인혜 전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은 “온습도 문제 때문에 이곳엔 실제 작품을 걸 수 없어서 작가를 소개하는 영상과 판화를 전시했다. 유영국의 판화는 세밀한 질감까지 살아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은데, 그동안 한국에서도 공개할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1층은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아카이브 자료들로 응접실처럼 꾸몄다. 작가가 직접 빚은 도자기, 실제 쓰던 화구와 소품들이 책가도처럼 진열됐고, 다큐멘터리 영상에선 작업의 토대가 된 울진의 깊은 산골짜기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1층 라이브러리에 놓인 책장. 작가가 직접 빚은 도자기, 소품, 실제 쓰던 화구가 책가도처럼 진열됐다. /유영국미술문화재단
3층 전시실에 유영국 작품 'Yang'(1966)이 걸려 있다. 오른쪽 창문 밖을 내다보면 베네치아 고택들의 지붕이 보인다. /유영국미술문화재단
하이라이트는 화업이 절정에 달한 1960~70년대 작품이 펼쳐지는 3층이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말하며 자연을 닮은 색상과 단순화된 형태를 탐구했던 유영국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솟아오르는 태양, 어스름한 새벽, 붉게 물든 가을 산이 색과 면에 살아있다. 지상층부터 3층까지, 단계적으로 올라야 마치 산 정상에 오른 것처럼 작품을 만끽할 수 있다. 김인혜 큐레이터는 “개막식 전날부터 유럽 각지의 컬렉터, 미술 관계자들 발길이 이어졌다. 얼핏 마크 로스코를 연상케 하지만, 숭엄한 자연을 표현한 독창적 화풍, 원색의 미묘하고 풍부한 변주에 반해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림 앞을 떠나지 않는다”며 “한국의 단색화 세대 이전에 이런 작가가 있었다는 데 서구 관람객들이 놀라고 있다”고 했다.
3층 전시실에 걸린 유영국의 1960~70년대 전성기 작품들.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올해 베네치아는 어느 해보다 한국 미술로 뜨겁다. 프랑스 파리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화가 이성자(1918~2009) 개인전, ‘숯의 화가’ 이배(68) 개인전도 나란히 개막했다. 창설 30주년을 맞는 광주비엔날레 아카이브 특별전, 한국관 건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도 열린다. 비엔날레는 11월 24일까지. 성인 기준 25.5유로(약 3만7000원). 유영국 전시 입장료는 성인 15유로(2만2000원).
유영국, 'Peak'(196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건희 컬렉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