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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문화 . 시사

"1028명의 영정사진을 찍었다… 입은 웃어도 눈은 울고 있었다"

by 주해 2022. 11. 20.

2019-10-26 07:33:4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25/2019102501547.html

 

"1028명의 영정사진을 찍었다… 입은 웃어도 눈은 울고 있었다"

1028명의 영정사진을 찍었다 입은 웃어도 눈은 울고 있었다 아무튼, 주말- 이혜운 기자의 살롱 영정사진 찍는 작가 알렉스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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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명의 영정사진을 찍었다… 입은 웃어도 눈은 울고 있었다"

영정사진 찍는 작가 알렉스 김

 

오지를 다니며 야생의 기운을 카메라에 담아온 사진작가 알렉스 김은 지난해 제주도에서 노인의 영정 사진을 찍으며 내려놓는 법을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그 사이 거칠던 표정이 많이 유해졌단다. 그는 “성산일출봉·현무암이 아니라 제주에서 80년 넘게 살아온 노인 1028명의 영정 사진이 ‘제주의 상징이자 얼굴’”이라고 말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아직도 사진을 찍으면 죽어서 하늘에 못 간다고 믿는다. 카메라가 영혼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영혼을 담는 심정으로 찍어야 하는 사진이 있다. '영정(影幀)' 사진이다.

지난해 제주도에서 노인 1028명의 영정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가 있다. 경력 20년 알렉스 김(본명 김재현·39). 그는 전 세계 오지를 다니며 아이들 사진을 찍는다. 2012년에는 티베트에서 조장(鳥葬·시신을 들에 내놓아 새들이 먹게 하는 장례)을 지켜보던 아이의 얼굴을 찍은 사진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픽 인물 부문을 수상했다. 그해 출간한 사진집이 베스트셀러가 됐던 '아이처럼 행복하라'. 파키스탄 수롱고 마을 '알렉스 초등학교' 이사장이기도 하다.

왜 제주도에서, 하필 영정 사진이었을까.

지난 11일 서울 성동구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억센 부산 사투리를 썼다.

웃는 영정 사진

그를 만나기 전 'KCTV제주방송'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지난해 8월 제주시 한 경로당에서 노인 서른 명의 영정 사진을 찍는 장면이었다. 화면 안의 그는 조명과 삼각대 없이 무릎을 꿇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떻게 제주도에서 영정 사진을.

"아는 동생이 제주 살아요. 외국에 취직이 됐는데 집 계약 기간이 절반 남았다는 거예요. 그동안 찍은 50만컷 사진도 정리할 겸 해서 내려갔어요. 하루는 저랑 친한 소프라노 유성녀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제주 '김만덕기념사업회'에서 영정 사진 봉사 사업을 하려는데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죠. 우리가 평소에 '나이 들면 시골에서 나는 영정 사진 찍고, 너는 트로트 부르는 봉사 하면 참 좋겠다'는 말을 하곤 했거든요. 어찌어찌하다 보니 작년 4월부터 제가 사진을 찍고 있더라고요(웃음)."

① 제주도 제주시 한 경로당에서 영정 사진을 촬영 중인 알렉스 김. / KCTV ② 파키스탄 ‘알렉스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찍고 있는 알렉스 김

 

"400명 찍었을 때 그만하려고 했어요. 그 집 계약이 끝났거든요. 이거 하는 동안 다른 사진을 못 찍어서 생활비도 없었어요. 영정 사진은 다른 일과 함께 할 수가 없어요. 하루에 몇 명을 찍든 집에 가면 기절해요. 사람의 혼(魂)을 찍는 거니까요. 그만하겠다고 했더니 줄 선 사람들이 엄청나게 밀려 있다는 거예요. 마음이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찍다 보니 알았어요. 영정 사진은 본인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사진이란 걸."

―왜 자식 위한 사진인가요?

"어머님들은 보통 한복을 입고 오세요. 그런데 한번은 제일 돈 많아 보이는 분이 양장을 입고 오셨어요. '내가 밥을 60년 해줬는데, 영감이 한복 한 벌 안 해준다'고 투덜대셔요. 그런데 옆의 아버님이 '집에 한복이 몇 벌인데'라는 거예요. 고개를 갸웃하며 촬영하는데 어머님이 목걸이를 가리키며 이거 잘 나오게 찍어달라고 해요. 아들이 중학교 수학여행 때 사다준 목걸이랍니다. 그게 한복이랑 안 어울리니까 양장을 입고 오셨는데 괜히 민망하니까 남편 핑계를 댄 거였어요. 그런데 카메라 앞의 어머니 표정이 너무 어색했어요. 제가 말했죠. '어머니, 나중에 아드님이 이 사진 계속 볼 거잖아요. 전 어머니 표정이 더 밝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웃어주세요.' 그때부터 전 웃는 영정 사진을 찍어요."

―잘 웃어주시나요?

"아뇨. 대부분 우세요. 제가 저승사자처럼 보인대요. (사진 하나를 보여주며) 이 할머니 입은 웃고 있잖아요. 그런데 눈은 울고 있어요. 슬픈 거예요. 저희가 아무리 '장수효도사진'이라고 홍보해도 사실은 다 알죠. 그렇게 자식이 눈에 밟힌대요. 특히 잘 안 된 자식들이. 정말 표정이 달라요. 얼굴이 평화로워 보이는 사람들은 자식이 다 잘된 사람들이고."

―삶이 한번 정리가 되는 걸까요.

"한번은 무척 얌전한 할머니가 찍고 나서 갑자기 뱃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세요. 너무 흥겹게 추시니까 앉아 있던 사람들도 모두 손뼉 치고. '한판 잘 살고 간다'랄까요. 사진 찍고 바로 앉아 고스톱 치는 분도 계시고(웃음). 팔순 시어머니 따라와 화장해 주는 쉰 살 며느리도 있고. 시집살이 엄청 했는데, 사무치게 서러웠는데, 또 이렇게 어머니 마지막 사진 찍는다니까 마음이 아프대요. 남편 사십구재에 사진 찍으러 온 분도 계시고."

―힘들었던 순간은요.

"하루는 기념사업회 분이 그래요. '작가님, 저희가 한 달 전에 신청받았잖아요. 그런데 오늘 할머니 한 분이 안 오셨어요.' 이유를 물으니 그새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제가 원래 사진 찍고 늦게 주기로 악명 높았거든요. 그날부터 영정 사진은 찍은 당일 다 보정해서 액자회사에 보내고 잤어요. 내 게으른 1분이 그분들에겐 한 달일 수도 있으니까. 가끔 그분들도 물어요. '나 죽기 전에 받아볼 수 있는 거지?'"

한 소녀가 부모를 위하는 마음에 감동받아 오지만 다녔다. 한 청년이 남을 위하는 마음에 감동받아 파키스탄 시골 학교 이사장이 됐다. 내년에 마흔이 되는 그는 아직 월셋집에 살지만 환하게 웃는 ‘알렉스 초등학교’ 학생들을 볼 때마다 행복하다고 했다.

―촬영 때 삼각대와 조명이 없던데요.

"전 흰 막 하나만 써요. 삼각대와 조명은 평형을 맞추고 실수하지 않겠다는 준비죠. 그런데 80년 넘게 사신 분들 얼굴이 어떻게 멀쩡하겠어요? 다 틀어져 있어요. 처음에 조명을 썼더니 다들 깜짝 놀라요. 내가 이렇게 늙었느냐고. 그래서 지금은 제가 다 맞춰 찍어요. 얼굴이 틀어지신 분은 제가 고개를 돌려 찍고, 눈이 너무 작으면 위에서 찍고, 체구가 작으면 무릎 꿇고 찍고."

―1년 안 돼 1000명이니, 금방금방 찍나 봐요.

"전 마음에 들 때까지 찍어요. 한번은 제주방송에서 촬영한다고 PD·작가들이 왔어요. 그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을 찍는데 표정이 너무 어색했어요. 몇 컷 찍고 상황을 보고 있는데 할머니가 떠나세요. 다 끝난 줄 알았대요. 줄 선 사람들 보고 미안하셨던 거죠. 몇 시에 도착하셨느냐 물으니 오전 10시라고 하세요. 그때가 오후 3시였거든요. 손을 잡으니 벌벌 떨고 계세요. 80년을 사신 분이 이게 뭐라고."

―부모님 영정 사진도 찍었다면서요.

"1028명째 찍은 날 바로 부산 집에 가서 말씀드렸어요. '그래도 제가 사진 찍는 사람인데 부모님 돌아가신 빈소에서 남이 찍은 영정 사진을 보게 되면 좀 슬플 것 같습니다. 이건 저를 위한 겁니다. 전 1028명 누가 보든 안 보든 혼을 다해 찍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 분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어디서 찍었나요.

"아버지가 중식 요리사입니다. 중국집 2층 손님방에 흰 천 붙여놓고 찍었어요. 두 분 다 아무 말 안 하세요. 너무 어색해하시고. 울지는 않으셨어요. 두 분 같이도 찍고. 그날 밤에 아버지가 저 부르시더니 10만원 주시더라고요. 1명당 5만원씩 사진 값 주신 거지요."

―부부 사진도 찍나요.

"제가 앞으로 찍고 싶은 게 집에 있는 노부부 사진입니다. 제일 부러운 모습이거든요. 한번은 할머니가 제게 오더니 할아버지 운전면허증을 꺼내면서 이 사진만 확대해서 찍어달라고 하세요. 할아버지가 아파서 거동이 힘들다고요. 그때 생각했어요. 백년해로한 분들, 결혼 생활 최소 50년 넘은 부부들 집에 찾아가서 찍고 싶다고."

―사진에 인생이 담기겠군요.

"굳이 묻지 않아도 보이더라고요. 한번은 앳된 얼굴의 할머니인데 손이 너무 커요. 손마디엔 흙이 잠겨 있고. 고생을 너무 많이 하신 거죠. 할아버지들은 군복이나 제복도 많이 입고 찍으세요. 그 직업에 자부심이 있으시니까."

오지학교 이사장

가족의 조장(鳥葬)을 치르던 한 티베트 아이의 웃는 듯 우는 얼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윤회의 과정이라고 믿는 표정이 담겼다. 2012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인물 부문 수상작이다.

그가 유명해진 때가 있었다. 배우 송중기가 군 복무 중 읽은 책 300권 중 가장 감명 깊었던 책으로 그의 사진집 '아이처럼 행복하라'를 꼽았을 때다. 2014년에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조카인 가수 제네비브 잭슨 등 잭슨 패밀리가 '알렉스 초등학교'를 돕겠다는 내한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제네비브는 미국의 한 작곡가에게 알렉스의 책을 소개받은 후 감동받아 곡 '에이스타'를 만들었고, 책 홍보 등으로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했다.

―왜 오지였나요.

"전 부산에 있는 대학 체육학과를 나왔어요. 한번은 서울 사는 친구 따라 용인 캐리비안 베이에서 안전 요원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수영장이 너무 큰 거예요. 전 그때까지 제일 큰 수영장은 부곡 하와이인 줄 알았거든요. '세상은 넓구나'라는 생각에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스무 살부터 배낭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디지털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때예요. 외국 가니깐 하나 사서 길·표지판 이런 거부터 찍었어요. 그땐 꼭 오지를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다 29세 때 라오스에서 시골 꼬마 애들하고 놀게 됐어요. 그런데 한 여자애만 표정이 안 좋아요. 물어보니 머리가 아프대요. 제가 두통약이랑 과자 몇 개를 줬어요. 친구들이랑 과자를 나눠 먹어요. 너무 예뻐서 주머니에 있던 초코파이도 주니깐 이건 안 먹고 딱 챙겨요. 그러더니 밭일하고 돌아오는 아빠한테 주는 거예요. 아홉 살짜리 애가 부모 위할 줄 아는 거지요. 그때부터 착한 사람들 찾아서 오지만 다니기 시작했어요."

―사진 전공은 아니었는데….

"따로 배우진 않았어요. 처음엔 사업가가 되고 싶었어요. 20대 중반엔 태국에서 가이드도 했고. 29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어 32세에 첫 사진집이 나왔어요."

―파키스탄에 학교도 있다고요.

"서른한 살 때 거벽 등반가 김세준 대장님과 파키스탄 라톡 등반 원정을 갔어요. 이 원정대는 짐을 들어준 현지 포터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현지 학교에 학용품을 전달하는 게 전통이에요. 어느 날 염소를 잡는데 주방보조 알리가 실수로 칼을 차면서 발에 구멍이 났어요. '내려가서 치료받아라'라고 하니 못 내려간대요. 가족이 아홉명인데 여기서 번 돈으로 일년을 먹고산대요. 대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일당과 치료비를 주고 네가 같이 가서 치료하는 것도 봐라'라고 하세요. 그래서 내려가려는데 발 다친 알리가 슬리퍼를 신고 있어요. 빙하가 녹은 산길을 3박 4일 걸어가야 하는데. 그걸 보더니 제 짐을 들어주는 포터 유숩이 자기 운동화를 벗어요. 둘이 아는 사이도 아닌데. 제가 찡해서 유숩에게 '우리가 너희 마을 학교를 도와줄게' 하고 갔어요. 그런데 이건 학용품으로 될 상황이 아니에요. 해발 3000m 마을이라 책걸상도 없고, 선생님도 없고. 그때부터 제가 그 학교를 개인적으로 맡게 됐어요."

―돈이 많으신가 봐요.

"저 아직 보증금 1000만원, 월세 40만원짜리 집에 살아요. 다음 달 월세도 못 내는데 학교에 돈 보내준 적도 있어요. 초반 3년은 옷도 마음대로 못 사 입었어요."

―자기만족인가요? 아니면 사명감인가요?

"제가 학교 한다고 했을 때 다들 말렸어요. 대장님도 '네가 몇 년 도와주다 힘들어서 그만두게 된다면 너를 원망해'라고 하셨죠. 또 한 분은 '차라리 그 마을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아이 대학까지 공부시키는 게 낫지 않으냐'고도 했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너무 삶에 미련이 없으니까 신께서 학교를 보내준 게 아닐까.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인생을 살라는 게 아닐까. 그게 벌써 8년이 됐어요."

―한국에도 힘든 사람은 많은데요.

"서울에서 월셋집 사는 처지인데 누굴 도와줘요. 한국은 여기 그릇에 맞는 돈을 가지신 분이 많으시잖아요. 한번은 파키스탄 마을 사람들에게 그랬어요. 제가 신고 있던 25만원짜리 등산화 벗어서 유숩 주면서 '나 돈 없는데 너희 도와주는 건 유숩의 착한 마음 때문이다'라고. 한번 가면 1000만원씩 들어요. 부모님이 유산으로 해주신 보험금 깨서 간 적도 있어요."

―지속 가능하지 않을까 봐 걱정입니다.

"전 상업 사진을 정말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2012년 책을 낸 것도 학교 운영금 벌려고 낸 거예요. 2016년에는 MBC스포츠랑 삼성이랑 협업해서 야구 중계 사진을 촬영한 적도 있어요. 지금은 SK텔링크와 '바른폰(https: //www.barunfon.com/alexkim)' 사업을 해요. 제가 찍은 파키스탄 알렉스초등학교 학생들 사진이 인쇄된 중고폰인데, 판매 수익 전액을 기부하는 거예요."

―행복한가요.

"한번은 여자아이 얼굴이 유난히 어두웠어요. 물어보니 아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대요. 학교도 못 나온대요. 엄마 혼자 딸 셋, 아들 하나 키우는데 밭에서 일하느라 아이들 학교를 못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어머니에게 한 달에 생활비 절반(10만원)을 줄 테니 아이들 학교 보내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번에 갔더니 오빠는 알렉스 학교 선생님이 돼 있고, 그 여자아이는 중학교에 다니더라고요. 어머니가 저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어요. 그 집이 원래 단칸방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보내준 돈을 모아서 방 세 칸짜리 집을 지었대요. 제가 월셋집 좀 살면 어때요. 대신 이렇게 행복한걸. 그 마을 사람들이 그래요. 학교 있기 전에는 중학교에 간 여자애가 없었는데 지금 80명이라고. 영어 한마디도 못하던 아이들이 영어로 책을 읽어요. 전 제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휴머니즘이라고 그는 말했다. 파키스탄 아이들에게 물질적 보답을 기대한 적은 당연히 없지만, 알렉스 김은 아이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줄 때 진심으로 따뜻해진다고 했다. 모두 부모님이라고 여기며 찍었다는 영정 사진들. 인화지의 아버지 어머니가 한결같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