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에 굴복하면 더 큰 위협, 그게 러·중에 맞서는 이유”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 시각) 수도 빌뉴스의 대통령궁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날 나우세다 대통령은 “원칙에 입각한 외교 정책이 국익에 가장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고 확신한다”며 “리투아니아 국민과 정치인들은 최소한 이 문제만큼은 일관되고 단결된 의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리투아니아 대통령실 제공
“눈앞의 불의(不義)를 보고 어떻게 중립적일 수 있습니까. 불의를 보면 반드시 대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국이 또다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기타나스 나우세다(59) 리투아니아 대통령 말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21일(현지 시각) 수도 빌뉴스의 대통령궁에서 “어떻게 러시아와 중국에 그리 당당하게 맞설 수 있나”라고 묻자 나온 대답이었다.
리투아니아는 인구 280만명, 국토 면적은 남한의 3분의 2 정도인 유럽 발트해 연안 작은 나라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 등 강대국을 상대할 때 소국(小國)답지 않은 의연한 외교정책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유럽연합(EU) 27국 중 가장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에 나선 나라가 리투아니아였다. 2021년에는 중국의 경제 보복 위협에도 대만 대표부를 개설했다. 다음 달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빌뉴스에서 열린다. 윤석열 대통령도 ‘파트너국 정상’ 자격으로 참석하는 자리다.
나우세다 대통령은 “우리는 과거 여러 번 쓰라린 경험을 통해 매우 단호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은 것에 굴복하면 더 큰 요구와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는 오랜 명제(命題)를 인용했다. 강국의 틈바구니에 있는 나라일수록 ‘힘’에 쉽사리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함부로 겁박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난 24일 발생한 러시아 용병 단체 바그너 그룹의 무장 반란에 대한 추가 질문에 “러시아 푸틴 정권이 뿌린 대로 거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퍼부은 폭력이 역효과를 낳았다”며 “다음 달 나토 정상회의에서 이에 따른 영향을 논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9년 3월 30일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린 리투아니아 나토 가입 15주년 기념행사에서 리투아니아 육군 병사들이 리투아니아 국기와 나토기를 게양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다음 달 11일부터 이틀간 빌뉴스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는 벌써부터 세계 각국의 초미(焦眉)의 관심사다. 우크라이나가 대반격에 나서고, 바그너 그룹의 반란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입지가 흔들리며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있는 와중에 열리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는 이 회의에서 F16 전투기 등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강화, 나토의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 스웨덴의 나토 가입 문제, 또 대만해협과 인도-태평양에서 가중되는 중국의 위협 대응 같은 논의를 적극적으로 이끌 예정이다.
나우세다 대통령에게 “한국에는 자유나 민주주의 같은 가치보다 국익이 중요하니 전략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고 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되도록 단순하게 이야기하겠다. 장기적으로, 원칙에 입각한 외교정책이 국익에 가장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고 확신한다. 이는 역사적 경험으로 확인된 것이다. 리투아니아 국민과 정치인들은 최소한 이 문제만큼은 일관되고 단결된 의견을 갖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다음 표적’으로 언급되는 국가 중 하나다. 어떤 위협을 받고 있나.
“푸틴의 최종 목표는 소련 제국 복원이다. 설령 우크라이나를 정복한다 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며, 발트해 국가와 다른 EU 국가가 다음 목표가 될 수 있다. 러시아는 우리에게 군사적 위협이나 에너지 공급 중단 등 직접적 압력 수단뿐 아니라 (국내 정치와 국민 여론을 겨냥한) 각종 선전·선동, 그리고 ‘역사 다시 쓰기’ 같은 수단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18세기부터 러시아 제국의 압제에 시달렸다.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에 합병돼 극심한 정치적 탄압을 겪었고, 고유의 말과 글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현재는 러시아의 역외 영토 칼리닌그라드와 그 맹방 벨라루스 사이에 끼여 일촉즉발의 군사적 위협을 받는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 내 친러 세력을 지원하면서, 과거 나치 협력자들이 지금 친서방파의 뿌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과 대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다양한 국가와 협력 관계를 수립하고 발전시킬 권리가 있다. 대만 대표부를 설치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하나의 중국’ 같은 원칙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중국은 명백히 과도한 반응을 보였다. 이 때문에 대중 수출이 무려 80%나 감소해 큰 고통을 겪었다. 기업들의 노력과 리투아니아 경제의 높은 회복 탄력성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정 국가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공급망 다변화는 경제 안보에 매우 중요하다.”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대통령궁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실 제공
리투아니아는 중국이 상품 수입을 중단하며 경제 보복에 나서자 “정치적 문제를 이유로 불공정한 무역 행위를 했다”며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분쟁은 ‘EU 대 중국’으로 번졌고, 곧 판결을 앞두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에 단호하게 대응할 수 있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나.
“서방의 지정학적 일부가 된 것, 즉 EU와 나토 회원국이라는 점이다. 덕분에 우리는 ‘집단 방위’의 안보 우산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아울러 러시아 에너지 자원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전방위적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 사회에 파고드는 러시아의 허위 정보, 정치적 선전과 성공적으로 맞서 싸운 덕분이기도 하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 맞서 우크라이나에 대량의 무기와 지원금을 제공했다. 곡사포와 장갑차, 헬리콥터, 방공 미사일 시스템, 드론(무인기), 대공포, 자동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 지원 총액이 10억 유로(1조4200억원)에 달한다. 리투아니아 국내 총생산(GDP)의 약 1.2%에 달하는 것으로, 지원국 중 GDP 대비 최대 규모다.
-같은 구소련 국가지만 우크라이나는 EU와 나토에 가입하지 못했는데.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지정학적 방향이 어느 쪽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모호한 중간 지대에 머물렀다. 소련 붕괴 이후 서유럽이 동유럽 국가들을 EU와 나토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기회의 창’이 열렸다. 매우 짧은 시간에 말이다. 우리는 이 기회를 성공적으로 활용했다. 독립 후 우리가 EU와 서방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빨리 이뤄진 덕분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친러와 친서방을 오가다 우리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사이 창은 닫히고 말았다. 결국 오늘과 같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됐다.”
-한국이 유럽에 적극적으로 무기를 공급하면서 서방 세계의 ‘무기고’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폴란드가 다양한 한국 무기를 획득하는 과정을 유심히 보고 있다. 한국이 자유 세계의 무기고가 되는 상황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과 리투아니아의 협력 강화 가능성을 모색 중이다. 아마도 올해 말에 한국을 방문할 것 같다. 그 전에 나토 정상회의에서 윤석열 한국 대통령을 만나 여러 논의를 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나토가 한국과 같은 아시아 태평양 국가와 관계를 강화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도심 전경. 도심 곳곳에서 중세 모습을 간직한 건물들을 찾을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 질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같은 생각’을 가진 국가들의 모임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들의 클럽이 폐쇄적이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중국과 관계에서 쌓은 경험, 리투아니아는 러시아를 다루는 방법에 관한 노하우를 가졌다. 우리가 각자의 경험을 결합하고 힘을 합치면 더욱 긍정적인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를 만난 21일은 6·25 발발 73주년을 나흘 앞둔 날이었다. “만약 한국에서 불의한 전쟁이 다시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우크라이나와 똑같다. 한국을 위해서 앞장서서 도울 것이다.”
☞기타나스 나우세다 대통령
경제학자 출신의 정치인이다. 빌뉴스 국립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리투아니아 중앙은행에서 은행 규제와 통화 정책 등을 담당했다. 2018년까지 SEB 은행의 수석 경제학자로 일하다 정치에 입문, 2019년 7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구(舊)소련 및 공산권 국가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패권 정책과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친러, 반(反)유럽 정책에 적극 맞서면서 리투아니아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0년에 결혼, 두 딸을 두고 있고 이 중 둘째가 한국 성균관대에서 공부해 한국어에 능통하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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