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에 삿대질, 서양과의 외교 방해… 개화 발목 잡았죠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 대사가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미국의 승리에 베팅(결과가 불확실한 일에 돈을 거는 일)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는 취지의 말을 해 ‘부적절하고 무례한 발언’이라는 논란을 빚고 있어요. 일각에선 싱하이밍 대사가 옛날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1859~1916)를 연상케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해요. 원세개는 누구일까요?
갑신정변 실패 후 조선에 급파된 청나라 군대의 지휘관 오대징이 서울에 들어와 수표교를 지나고 있어요. /조선일보DB
1882년, 내정간섭을 시작한 청나라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을 계기로 조선은 청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청나라는 조선 국왕을 임명하는 관계라는 것이죠. 그럼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걸까요?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철저히 형식적인 국제 외교 관계였어요. 중국 대륙을 차지한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대접하는 외교 의례만 지키면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거의 간섭하지 않아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880년대에 들어서서 변화가 생깁니다. 조선이 개항하고 6년 뒤인 1882년(고종 19년) 차별받던 구식 군대가 변란을 일으킨 임오군란이 일어났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처음이었죠.
1841년 1차 아편전쟁을 그린 그림. 서양의 우수한 군사력에 패배한 청나라는 근대화 운동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어요. /위키피디아
당시 1차(1840~1842), 2차 아편전쟁(1856~1860)으로 서양 세력의 우수한 군사력 앞에 쓰라린 패배를 겪은 청나라는 ‘양무(洋務)운동’으로 알려진 근대화 운동을 통해 군사력 강화를 꾀하고 있었어요. 그 중심인물이 북양함대를 만든 북양통상대신 이홍장(李鴻章·1823~1901)이었고, 그의 부하로서 조선에 파견된 인물이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간 것으로 유명한 마건충(馬建忠·1845~1899)과 이후 조선에서 위세를 떨친 원세개였습니다.
청나라 입장에서 절치부심 노력한 양무운동으로 강해진 군사력을 써먹을 만한 근처의 ‘만만한’ 나라가 어디였을까요?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 내정에 개입한 뒤, 청나라 이홍장과 마건충, 원세개는 아예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1882년부터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청나라는 관리를 조선 땅에 두고 내정간섭에 나섰던 것입니다.
조선에 온 26세 청년 원세개의 횡포
1884년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켰어요. 이것이 갑신정변입니다. 이 정변에 군사적으로 개입해 갑신정변을 개화파의 ‘삼일천하’로 끝나게 한 세력이 청나라였습니다. 이듬해 4월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톈진조약이 체결돼 청·일 양국 군대는 철수했지만, 일단 중국으로 돌아갔던 원세개는 그해 10월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계기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원세개의 모습. /위키피디아
스물여섯 살 청년 원세개는 기세등등했습니다.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긴 직함을 달고 온 원세개는 이후 10년 가까이 조선에서 총독 같은 권세를 누렸습니다. 사람들은 젊은 그를 ‘원 대인’ ‘감국대신(나라를 감독하는 대신)’이라 불렀습니다. 원세개의 횡포는 대단했습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궐 문을 무단출입했고, 조선 조정의 공식 행사에서 늘 상석(윗자리)에 앉았습니다. 조선 왕인 고종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일어서지 않았을 뿐더러 삿대질을 하는 일까지도 있었다고 합니다.
1886년 고종이 러시아와 손잡고 청나라에 대항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눈치챈 원세개는 고종과 대신들을 겁박했습니다. “병사 500명만 있다면 국왕을 폐하고 중국으로 데려가겠다”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고위 관리 스무 명을 한꺼번에 친청(親淸) 인사들로 갈아치워 놀란 조선 주재 미국 공사가 ‘무혈 정변’이라고 비꼰 일도 있었습니다.
1913년 원세개(맨 앞줄 왼쪽에서 셋째)가 대총통 시절 미국 사절단과 함께 찍은 사진. /위키피디아
1882~1894, 12년의 중국 침탈기
원세개의 횡포는 무례하고 안하무인이라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질적인 ‘조선 침탈’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원세개를 내세워 뒤늦게 조선을 속국화하는 데 나선 청나라는 자국 상인들이 조선 방방곡곡을 누비며 잇속을 챙길 수 있게 했습니다. 원세개는 군함까지 내주며 인삼 밀수를 부추겼고, 밀수 상인들이 밀수를 적발한 조선 해관(세관)을 습격하자 오히려 이들을 감싸고 돌았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고 윽박지르며 조선이 갓 수교를 맺은 서양 여러 나라와 외교 활동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이런 평가를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조선이 자주적으로 개화와 근대적 개혁을 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인 1880년대에 청나라와 원세개가 내정간섭과 압박을 통해 그 기회를 박탈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앞서 조선이 망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얘기죠.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45년까지 40년 이어진 일본의 침략 시기에 앞서, 1882~1894년 12년간 중국(청)의 침탈 시기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신해혁명의 ‘배신자’ 원세개
원세개는 한국 근대사뿐 아니라 중국 현대사에서도 악명 높은 인물입니다. 청일전쟁 뒤 원세개는 중국에서 북양 군벌(군사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특권을 장악한 군인 집단)의 실력자가 됐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쑨원(孫文)이 임시대총통에 올라 중국 최초의 공화정인 중화민국이 수립됐습니다. 이후 군사력을 갖춘 원세개는 청나라 황제를 퇴위시킨다는 조건으로 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았습니다. 그러나 1915년 말 스스로 ‘중화제국’ 황제에 즉위해 공화 혁명을 배신했죠. 강한 반발에 부딪혀 3개월 만에 황제 제도를 취소한 뒤 울분 속에서 병으로 죽었습니다.
현행 우리나라 중국어 표기는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그 이전 인물은 우리말 발음으로 표기(공자·제갈량 등)하고 그 이후 인물은 원음으로 표기(장제스·시진핑 등)합니다. 원세개는 신해혁명 이전은 ‘원세개’, 이후는 ‘위안스카이’로 표기되다 보니 종종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일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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