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3 10:10:57
거장의 세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3대 피에타, 피렌체서 사상 첫 합동 전시
바티칸 피에타, 반디니 피에타, 론다니니 피에타 - 미켈란젤로의 세 피에타 작품에는 그의 인생 여정과 예술관이 고스란히 투영돼있다. 스물네 살에 완성한 바티칸 피에타는 예수의 몸과 성모의 옷 주름까지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일흔다섯에 만든 반디니 피에타에서는 노쇠하게 표현된 육체에서 비애감이 묻어난다. 죽기 사흘 전까지 작업한 론다니니 피에타는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추상화돼 고통과 슬픔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비지트바티칸시티닷컴·위키피디아
올해 피렌체의 오페라델두오모(Opera del Duomo) 박물관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세 작품을 한 공간에 전시했다. 피에타(Pièta)란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시신을 두고 성모가 애도하는 주제의 작품을 말한다. 24세에 완성한 바티칸 피에타, 75세에 이르러 자신의 묘소에 설치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반디니(Bandini) 피에타, 그리고 미켈란젤로 최후의 작품 론다니니(Rondanini) 피에타를 함께 볼 수 있는 정말로 흔치 않은 기회다(다만 바티칸 피에타와 론다니니 피에타는 원본은 아니고 정교하게 복제한 캐스트 작품이다). 세 작품을 보면 거장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영적 성숙 과정을 짐작하게 된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는 1475년 3월 6일 피렌체 인근의 카프레제(Caprese)에서 출생했다. 6세에 어머니가 사망하여 4년 동안 유모에게 맡겨져서 자랐다. 마침 이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라서 이때부터 어린 미켈란젤로는 돌 만지는 데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애달픈 심정과 차가운 돌에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내는 평생의 업이 운명처럼 엮인 것이다.
유럽 100개 도시 평화행사 위해 기획
부친은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처럼 공직에 나아가기를 희망했으나 그의 강렬한 예술적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13세에 기를란다이오와 동업하는 공방에 도제로 들어가서 각종 기예를 익혔다. 곧 당대 최고 권력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눈에 들어 그의 후원을 받으며 일취월장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1492년 후원자 로렌초가 사망한 후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역사는 격동기로 들어가고, 젊은 예술가 또한 굴곡진 삶을 살았다. 때로 박해를 피해 이웃 도시로 피신하거나 혹은 권력자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숨어 살아야 했다. 최근 피렌체의 산 로렌초 대성당 지하 공간에 은거하는 동안 미켈란젤로가 벽에 그린 스케치 자료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최상의 작품들을 생산해냈다. 특히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어준 작품이 바티칸 피에타다.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인 장 빌레르(Jean Bilhères de Lagraulas) 추기경이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묘소를 장식할 작품을 주문한 것이다. 완성한 작품은 그야말로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 몸의 근육과 핏줄, 물결치는 듯한 성모 옷의 주름까지 어떻게 이토록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사실 너무 아름답게 묘사해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를 무릎에 올려놓은 성모’라는 조각상은 거의 볼 수 없는 구도로서, 이전 시기 독일에서 목재로 만든 작품이 소수 있을 뿐이다. 그 작품들은 모두 극단의 슬픔에 잠긴 성모를 나타낸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완벽한 피라미드 구도이고, 그리스도는 고대 그리스 신상(神像)에서 볼 수 있는 멋진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성모는 앳되 보이는 얼굴에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성모자(聖母子)의 아름다움은 육체적인 게 아니고 순결과 성스러움에서 오는 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명했지만, 역시나 젊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으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가 다시 피에타 작품을 만든 것은 50년이 흐른 뒤다. 그의 나이 75세에 죽음이 멀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이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예술을 수행한 것이다. 당시 그의 젊은 제자 체키노 브라치(Cecchino Bracci)가 일찍 세상을 뜨고, 이어서 미켈란젤로의 뮤즈였던 여류 시인 비토리아 콜론나(Vittoria Colonna)도 사망하여 충격을 받았을 터이다. 그는 자신의 묘소를 장식할 작품으로 반디니 피에타를 제작했다. 미완 상태로 남아 있던 이 작품은 후일 조수 칼가니(Tiberio Calgani)가 완성했고, 오랫동안 몬테카발로(Montecavallo)의 반디니 빌라에 있던 것을 메디치 3세가 구입하여 피렌체로 가지고 왔다.
네 인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대리석 조각 하나로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거대한 규모다. 작품 분위기는 이전 피에타와는 완전히 달라서 깊은 비애감을 자아낸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완벽한 육체가 아니라 축 처져 있으며, 성모의 몸짓과 표정은 크나큰 고통을 드러내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이 세 인물을 마치 품에 안듯이 위에서 굽어보는 니코데모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바리새파 지도층 인사였던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인물로 성경에 나온다.
미켈란젤로는 누군가가 이 작품을 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궁금증을 참지 못한 바사리(동시대의 화가이자 예술가들의 전기를 쓴 작가)가 문 너머로 들여다보는 것을 알아챘다. 미켈란젤로는 램프를 땅에 떨어뜨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역시 이 램프처럼 곧 쓰러지고 내 빛도 사라질 거요.”
마지막 작품 론다니니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오랜 예술적 여정의 도달점이라 할 만하다. 그는 1552년경 작업을 시작하여 죽기 사흘 전까지 이 작품을 다듬고 있었다고 한다. 환영(幻影)같이 가늘고 긴 모습의 그리스도와 성모는 거의 땅에서 떨어져 나와 공중에 떠있는 듯하다. 이들의 헐벗은 신체는 이목구비가 거의 없고, 형상을 잃은 듯 추상화되어 있으며, 고통과 슬픔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그리스도의 발이 꺾여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가까스로 서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든다. 성모가 죽은 그리스도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걸까(논리상으로는 그래야 할 것이다), 아니면 그리스도가 성모를 업고 있는 걸까? 그리스도가 자신의 어깨에 얹혀 있는 성모의 손을 느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는 허물어진 걸까?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현대 조각가 헨리 무어는 이 피에타야말로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며, 미켈란젤로 89년의 삶이 온전히 녹아 있다고 말했다.
미켈란젤로 키운 유모의 남편이 석공
노년의 피에타 작품들은 스물네 살 청년 시기에서 한참 멀어졌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누군가의 오해에 발끈하여 성모의 옷깃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던 미켈란젤로가 아니다. 후기의 작품들은 의도적으로 미완(non finito) 상태로 두어서, 돌에서 형상을 완전히 꺼내지 않고 일부가 아직 돌 속에 묻혀 있는 상태다. 이는 플라톤 철학 혹은 당대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관련이 있다. 플라톤은 이 세상의 그 어느 예술품도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본질적 대응물(counterpart)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는 죽은 돌에서 생명이 움트고 있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유럽 도시 100곳의 시장과 주교들이 모여 평화를 기원하는 대회를 기념하는 이 전시회는 단테의 ‘신곡’ 중 천국 편 29장의 구절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뿌리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를 모토로 제시했다. 미켈란젤로 자신이 피에타를 제작하며 이 말을 했다고 하지만, 동시에 질병과 전쟁의 피해를 본 세상의 어머니들과 아이들에 대한 위로의 말이라고도 한다. 피에타는 고통의 어둠 속에서 빛에 대해 명상하는 작품이다.
[’바티칸 피에타’ 둘러싼 논란]
미켈란젤로 작품이라고 사람들이 믿지 않자 성모 옷깃에 이름 새겨
바티칸 피에타는 작품 완성 직후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이처럼 아름다운 작품을 애송이 조각가가 만들었을 리가 없으며,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는 소문이 돌자 미켈란젤로는 분개하여 성모의 옷깃 부분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미켈란젤로가 서명을 남긴 유일한 사례인데, 그는 곧 이런 일을 한 데 대해 깊이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33세에 죽었으니 성모 또한 최소한 40대 이상의 나이여야 하는데 왜 그렇게 젊고 아름다운 소녀 얼굴을 하고 있는가? 또 아들이 비참하게 죽었는데 성모는 왜 그렇게 평온한 표정인가? 사실 이 작품에서 나타내고자 한 것은 육체적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성모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적 아름다움을 나타냈다고 해명했다. 그리스도는 사흘 후에 부활할 터이므로 영원히 죽은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잠자는 상태이고,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성모 또한 잠든 어린아이를 내려다보는 어머니 같은 표정이다.
1972년 한 광인이 이 작품을 망치로 쳐서 코가 깨지고 팔이 부러지는 참사를 겪은 후 이제는 방탄 유리로 보호하고 있어서 바티칸에서 이 작품을 차분히 감상하기는 어렵다. 이번 기회에 피렌체에서 아주 가깝게 보았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죽은 그리스도의 손이 ‘엄마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있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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