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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전시 . 탐방 . 아트페어

그저 빛… 태초에 빛이 있었다

by 주해 2022. 12. 16.

존 브렛 1871년작 '도싯셔 절벽에서 바라본 영국 해협'(106x212.7㎝). /테이트

태초에 빛이 있었다.

범선을 타고 대양(大洋)으로 나아가자, 새로운 전망처럼 천상의 기운이 구름을 뚫고 쏟아진다. 그것은 또한 인간을 겸손케 하는 장엄한 시선처럼 느껴진다. 천문학자였던 영국 화가 존 브렛(1831~1902)은 기후와 빛의 순간적 변화에 매료됐고, 자주 항해하며 바다의 기분을 정밀한 풍경화로 남겼다. 1871년 완성한 ‘도싯셔 절벽에서 바라본 영국 해협’처럼, 푸른 해수(海水) 위로 쏟아지는 풍부한 일조량이 눈을 맑게 한다.

미술의 기원, 빛을 주제로 색과 표현의 근현대사를 톺아보는 전시 ‘빛’이 서울 중계동 북서울미술관에서 5월 8일까지 열린다. 빛 없이 회화가 탄생할 수 없고, 이 광선은 인류가 희구해온 가장 유구한 상징이라는 점에서 이 전시는 신년과 시작의 의미를 또한 획득한다. 영국 테이트미술관 소장품 전시로, 존 컨스터블·바실리 칸딘스키 등 근대의 개척자부터 애니시 커푸어·쿠사마 야요이 등 현대미술 거장까지 43인의 작품 11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이름만으로 눈부신 면면이다.

클로드 모네 1891년작 유화 ‘엡트강가의 포플러’. /테이트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1843년작 유화 ‘빛과 색채-대홍수 후의 아침, 창세기를 쓰는 모세’. /테이트

광휘는 초월적 지위를 지닌다. 윌리엄 블레이크 ‘착한 천사와 악한 천사’(1795~1805) 등 종교적 서사를 담은 대작이 전시의 포문을 여는 이유다. 이어 대기(大氣)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1843년 ‘빛과 색채–대홍수 후의 아침, 창세기를 쓰는 모세’로 보여준 빛의 주관적 해석은 인상파로 계승되고, 인상주의 태두(泰斗) 클로드 모네의 ‘엡트강가의 포플러’(1891)가 그 증거로 전시장에 놓여 있다. 그림 완성을 위해 모네가 돈까지 지불해가며 벌목을 늦추려 했던 나무들, 이 전시에서 가장 값비싼 그림으로, 보험가만 500억원에 달한다.

이번 전시는 영국의 국립미술관 격인 테이트미술관이 자체 소장품을 ‘빛’이라는 테마로 엮어 수출한 기획 상품이고, 지난해 상하이 푸둥미술관을 거쳐 북서울미술관에 상륙했다. 테이트는 엄연히 공공 미술관이지만, 정부 지원금은 예산의 30% 미만이다. 나머지는 미술관이 알아서 충당해야 한다. 후원자를 모으고, 공격적인 세일즈용 전시를 기획하는 이유다. 정부 지갑에만 목매는 국내 사정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빛은 스스로 돕는 자를 향해 내리쬔다.

프랑스 설치미술가 필리프 파레노가 고안한 개념 미술 작품 ‘저녁 6시’(2000~2006)가 관람객들 발 밑에 놓여 있다. /정상혁 기자

한국 미디어아트 거장 백남준의 '촛불 TV' 안에서 실제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재현을 넘어 현대미술은 빛을 창조한다. 프랑스 작가 필리프 파레노가 내놓은 일종의 개념미술 ‘저녁 6시’(2000~2006)는 바닥에 깔린 카펫이다. 창가로 넘어온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어디에도 창문은 없다. 천장 조명일 것이라는 짐작 역시 여지없이 부서진다. 그림자는 카펫 무늬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동결, 경험의 전복으로 유사 자연(Pseudo nature)이 탄생한다. 덴마크 설치미술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거대 유리 구조물 ‘우주 먼지 입자’(2014)는 천체 폭발 이후 먼지처럼 어둠 속에서 반사광을 뿌리고, 항공기 조종사 출신 제임스 터렐이 창조한 하늘 연작 ‘레이마르, 파랑’(1969)은 칸막이벽 뒤 형광등에서 방사되는 푸른 빛으로 지상에 상공의 공기를 흘린다. 전영백 홍익대 교수는 “눈으로 본 대로 빛을 그리려 했던 초기 모던아트의 시도가 포스트모던의 끝자락인 설치미술이 만들어낸 빛의 공감각과 만난다”고 평했다.

전시장 입구에 백남준이 1975년 처음 제작했던 ‘촛불 TV’가 놓여있다. 테이트 소장품은 아니나, 서울 전시에 한해 한국 대표 작가의 작품을 추가한 것이다. TV를 비우고 묵상의 빛을 넣었다. 매일 갈아 끼워 넣는 양초에서 매일 새 빛이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