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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김환기 작품관

김환기(1913~1974)-산-80.5☓100.4cm (40) -1955-1956 년

by 주해 2022. 11. 19.

2019-08-23 22:25:47

 

 

LITERATURE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탄생 100주년Ⅱ 김환기, 영원을 노래하다: 2013, p.52, 60(installation view).

Lotte Gallery, 롯데갤러리 잠실점 개관 기념展 변화의 시대, 불멸의 화가: 2012, p.27.Maroniebooks, 김환기: 2012, p.63.

Art Books, 김환기의 삶과 예술 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 2002, p.10.

Samsung Culture Foundation, 한국의 미술가 김환기: 1997, p.88.

Youlhwadang, 김환기: 1997, p.78, pl.24.

Whanki Museum, 김환기 20주기 회고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94, p.49.

ljisa, 樹話 金煥基 畵集: 1984, pl.24.Korea Britannica Corporation, 김환기: 1980, p.33.

 

EXHIBITED

Seoul, Whanki Museum, 김환기 탄생 100주년 김환기, 영원을 노래하다: 2013.9.28-12.31.

Seoul, Lotte Gallery, 롯데갤러리 잠실점 개관 기념展 변화의 시대, 불멸의 화가: 2012.3.16-4.16.

Seoul,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Korea, 김환기 회고전: 1975.12.3-20.

 

작품설명

‘산’이라는 소재는 김환기에게 있어 항아리 못지않게 비중 있게 다루어진 소재이다. 파리로 가기이전에도 제작되었고, 귀국 후에도 이어져 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통해 그의 양식적 변모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대상 본연의 형태와 양감, 공간과 색채가 담겨 면적 구성을 보여주던 화면이 파리시기부터 본질을 꿰뚫고 핵심을 응축한 선線을 통한 구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선은 오래 전부터 김환기가 추구한 중요한 조형요소로 파리시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화면을 점유했다. 파리에 오기 전의 산은 산 이외의 자연물과 한데 구사되었으나 파리에 머물면서는 산세의흐름을 추상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실재하는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의 화면속에서 중첩된 산의 봉우리는 겹쳐진 선이 되고, 깊은 골짜기는 단선을 중첩시켜 표현하며 기호화된 화면을 구성했다. 선의 사용을 통한 관념적이고 추상화된 산으로의 변모는 파리시기 김환기의 작업을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서양의 물감으로 그린 동양의 산수화 같은 김환기의 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그가 파리에서의 가진 첫 번째 개인전과 마지막 개인전의 포스터삽입 작품으로 선택 되어졌다. 세계미술의 중심에서 자신의 전시를 대표하는 포스터에 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선택한 것은 한국의 화가로서의 미감을 서구에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1955년 서울에서 제작을 시작하여 1956년 파리에서 완성된 출품작은 산과 달, 구름이 도식화,기호화되어 풍성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자연의 이미지에서 추출된 장식적 모티브의 변주는 작가의 자연에 대한 상념의 간결한 집약으로 빨강, 파랑, 노랑의 강렬한 색감을 세련된구성 아래 밀도 있게 채워 넣었다.

구름은 산을 끼고 흐르는 냇물 같기도 하고, 산은 구름의 여울에 투영되기도 한다. 투명한 탈속의 심성으로 자연을 관조하는 작가의 심성이 자연에 대한 독특한 비전을 낳게 하고 있으며 그 자연의 모습은 해맑은 색면과 그것을 누비는 색띠의 조화로운 앙상블로 표현되어 있다. 화면에서 도식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달, 산, 구름, 강물은 윤택한 마티에르와 그 마티에르에 동화된 색조로 표현되어 정감을 느끼게 하는데 자연스럽게 굴곡진 능선을 통해 산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나란히 떠있는 달과 함께 은은한 색의 언어로서 화면을메아리 치게 한다.김환기의 파리행은 그를 예술가로 존중하고 아낌없이 내조를 펼쳤던 아내 김향안의 도움이 컸다.구라파에 다녀오면 미술평론을 해보고 싶다며 종종 프랑스로 가자고 권했던 그녀는 김환기가 프랑스에 가보자고 하자 바로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하며 적극적으로 준비했다. 김환기 보다 1년 먼저 파리로 건너가 화가 및 화상들과 교류했으며, 파리에 도착하여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무리가없도록 집과 작업실을 마련했다.

아내로부터 준비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김환기는 신사실파 동인들의 후원으로 1956년 2월, 3일부터 8일까지 6일 동안 동화백화점 동화화랑에서 도불미전渡佛美展을 가진 후 5월, 파리에 정착했다.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준 아내 덕분에 김환기는 파리 정착 후 세 곳의아틀리에에서 작품을 제작했다. 처음엔 룩상부르그 공원 근처의 아틀리에Atelier Rue d’Assas에서 작업하다가 생루이 섬의 아틀리에Atelier L’île Saint-Louis로 옮겨 작업 했으며, 이후 한 번 더 아틀리에를 옮겨뒤또 거리의 아틀리에Atelier Rue Dutot에서 마지막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했다. 제작에 열심이었던 것만큼 작품 발표도 열심이었다. 파리 체류 중에 총 다섯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파리에 도착한 해인1956년 10월과 이듬해 6월에 베네지트 화랑Galerie M. Bénézit에서 전시를 가졌고 몬테카를로와 니스,브뤼셀 등지에서도 작품을 선보였으며, 1958년 3월에는 앵스티튀 화랑Galerie de l’Institut에서 전시를 개최하여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적극적으로 발표하는데 혼신의 열정을 기울였다.

하루에 10시간에서 15시간을 작업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했던 파리에서의 작품세계는 서울시기와 비교했을 때 급격한 변화를 보이지는 않는다. 기존의 기조를 이어나간 것으로 여겨지는가장 주요한 이유는 소재의 연속성이다. 그가 소중히 여겼던 한국적인 모티프가 파리의 화폭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한국의 화가들이 그 곳의 여러 경향을 받아들여 화풍이 변화했던 통상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파리에서 작품을 소개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우리 것을 돌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김환기는 새롭고 다양한 미술문화에 흔들리지 않고 관조하며 탐색의 시기를 가졌고, 서울시기의 작업을 이어나가며 그 곳에서 익힌 세련된 조형과 색채 감각을 더했다. 이는 아마도 서양 미술의 흐름 속에서 휩쓸리지 않고 독창적이고 고유한 자기존재를 표출하기 위한 작가의노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소재의 확대와 푸른 주조색, 선묘의 활용으로 확인된다. 소재는 십장생과 같은 관념적 소재로까지 그 범위를 넓혔고, 푸른색의 사용을 통해 고국에 대한 상징성과 작가의 심성을 표현했으며, 선묘 통한 대상의 응축을 보여주었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파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장소였다. 파리로 찾아온 많은 거장들이 파리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라 볼 수 있었고 자신의 색깔이, 자신의 냄새가 어떤 것인지를 인지할 수 있었다.

언젠가 샤갈은 이런 말을 했다. 파리에 나온 자신은 마치 무대 위에 올려져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노라고, 자신을 그처럼 환히 볼수 있었노라고. 샤갈은 파리에 나오면서 비로소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것, 러시아에서 나온 유태인이란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이 그랬다. 그들은 한결같이 파리에 나와서야 자신이 누구인가를 자각할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김환기의 파리 체류도 자기 발견의 계기였다. 자신이 속해 있는 곳이 어디이며 자신의 고유한 정신이, 고유한 노래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오광수(1996), 『김환기』, Youlhwa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