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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김환기 작품관

김환기(1913~1974)-백자와 꽃-41.1☓60.9cm (12) -1949년-oil on canvas

by 주해 2022. 11. 19.

2019-08-23 22:23:20

 

 

LITERATURE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Whanki A Pioneer of Korean Modern Art: 2017, pp.38-39.

Maroniebooks, 김환기: 2012, p.75.

Whanki Museum, 김환기 30주기 기념전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1부: 2004, p.45(installation view), 51.

Musée Whanki, 수화와 백자 - 김환기 컬렉션 일부 -: 1999, p.87(installation view).

Whanki Museum, 김환기 25주기 추모전 백자송白磁頌: 1999, p.11.

Samsung Culture Foundation, 한국의 미술가 김환기: 1997, p.64.

Whanki Museum, 近園과 樹話: 1996, p.47.

 

EXHIBITED

Seoul, Gallery Hyundai,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 2012.1.6-2.26.

Seoul, Whanki Museum, 김환기 30주기 기념전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1부: 2004.10.12-11.14.

Seoul, Musée Whanki, 김환기 25주기 추모전 백자송白磁頌: 1999.5.4-7.4.

 

작품설명

내 뜰에는 한아름 되는 백자白磁 항아리가 놓여 있다.보는 각도에 따라 꽃나무를 배경으로 삼는 수도 있고, 하늘을 배경으로 삼은 때도 있다.몸이 둥근 데다 굽이 아가리보다 좁기 때문에 놓여 있는 것 같지가 않고 공중에둥실 떠 있는 것 같다.희고 맑은 살에 구름이 떠가고 그늘이 지고 시시각각 태양의 농도濃度에 따라청백자靑白瓷 항아리는 미묘한 변화를 창조한다.칠야삼경漆夜三更에도 뜰에 나서면 허연 항아리가 엄연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더욱이 달밤일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月光으로 인해 온통 내 뜰에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항아리는 더욱 싱싱해지고 이슬에 젖은 청백자 살결에는그대로 무지개가 서린다.어쩌면 사람이 이러한 백자 항아리를 만들었을꼬……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동한다.싸늘한 사기砂器로되 다사로운 김이 오른다.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體溫을 넣었을까.- 김환기(1955.5), 「청백자 항아리」전기 작품들은 소재와 구성 등이 이후시기와 완연하게 별개의 작품으로 구분되어지기 보다는연장선에 있어 작가의 예술관을 파악하고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전기는 해방 전과 후, 한국전쟁, 분단 후로 다시 나누어 볼 수 있어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해당되지만 파리 시기부터 뉴욕 시기에 이르는 20여 년과는 달리 불안정한 정세 등으로 인하여 작품 제작이 여건이 좋지 않았거나 소실된 경우가 많아 그 희소가치가 높다.해방 전, 김환기는 일본에서 이과전, 백만회, 자유미술가협회 등을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일본의 군국주의 정책이 노골화되어 전위미술을 탄압하고 제어하는 상황을 맞게 되고, 1940년 가을부터는 자유미술가협회가 미술창작가협회로 명칭을 변경하게되는 등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많은 미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멈추고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고 김환기도 1941년에 미술창작가협회를 탈퇴하고 대외적인 작품 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채 고향인 안좌도와 서울을 오가며 지냈다. 해방을 맞이한 후 유영국, 이규상과 함께 신사실파新寫實派를 결성하며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새로운 사실을 표방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던 신사실파는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한 전통과 민족을 혼합한 새로운 조형의식을 추구하였다는 데의미가 크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1930년대의 순수한 구성 위주의 추상에서 자연에 대한 모티브로의 이행을 보여주는데, 자연과 전통 그리고 탈속의 세계를 추구하는 성향을 엿보게 한다.“ 해방과 더불어 일어난 조국에 대한 재자각과 자기모색은 우리의 자연과 정서·전통문화를표현하는데서 그 출구를 찾았고 이는 도자기 등에 심취하면서 더욱 심화되어 갔다. … 일본 유학시기와 실험기를 지난 후, 해방과 더불어 온 한국적 자각 속에 자기예술의 경지를정립하려는 출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후 부산시절과 파리 시절은 이 때 설정한 방향에서조형감각과 기법, 시정을 더욱 심화·다양화해 가는 도정이었다고 보겠다.”- 이석우(1987.2), 「서양화가 김환기 - 불굴의 창의성으로 피어난 그림」, Misulsegye신사실파 활동 시기인 1949년에 제작된 출품작은 12호 크기의 가로 화폭에 어둠이 내려앉은 밤풍경을 담고 있다. 중앙에 항아리와 고목, 꽃을 수직으로 배열하고 그 뒤로 완만한 산등성을 지나게 한 구성을 보인다.

항아리의 표면은 받치고 앉은 고목의 고적한 색채를 흡수하고 항아리의 그림자는 고목에 드리워져 두 개의 색면이 만들어졌는데, 구연부를 생략한 채 상단에서부터 과감하게 채워 그려 넣은 항아리와 상단만 묘사된 고목 간의 비율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을 완화시켜주며 화면 밸런스를 훌륭하게 이끄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고목 앞으로 하나의 줄기에서 뻗어 나와 둘로 갈라져 피어오른 두 송이 꽃의 줄기와 산기슭에 가미된 검은 색선이 고요한 화면에 잔잔한 운율을 형성해내고 있다. 애써 모았던 골동품들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사라지기 전까지 김환기는 골동품 수집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매일같이 골동품을 사서 성북동 집으로 가져오곤 했는데 특히 자기 팔로 안아서 한아름 되는 유백색 대호와 청백색의 큰 항아리들을 좋아했다고 한다.때로는 마당에 내다가 육모초석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고, 뙤약볕을 피해서 그늘에 옮겨 놓고 바라보고, 방 안에서 탁자에 올려두고 바라보며 감상하고 영감을 얻었다.

미美에 대한 개안은 우리항아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힌 김환기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고 작품을 통해그 애정을 드러냈다.“<나무와 달>과 같은 신사실계열의 작품인 1949년 <백자와 꽃>은 시기적으로 볼 때 백자를 소재로 한 정물화 중 매우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정면에서 본 받침대 위의 백자를 하나의 조형적 요소로 단순화시켜 화면 한가운데에 배치하고 절제된 배경의 청색을변조시키면서 백자와 아련하게 뒤섞여 서정적 효과를 자아내게 한 점에서 볼 때 1950년대그의 전형적인 정물화들을 예시해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권행가·정인숙(1997),

「작품세계 - Ⅱ. 부산피난시절과 서울시대–사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

『한국의 미술가 김환기』,Samsung Culture 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