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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김환기 작품관

김환기(1913~1974)-항아리-49.7☓61.2cm (12) - oil on canvas -1958년

by 주해 2022. 11. 19.

2019-06-14 23:53:46

 

 

LITERATURE

 Maroniebooks, 김환기: 2012, p.52.

Whanki Museum, 김환기 30주기 기념전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1부: 2004, p.44 (installation view), p.47.

Musée Whanki, 수화와 백자 –김환기 컬렉션 일부–: 1999, p.86. (installation view)

Whanki Museum, 김환기 25주기 추모전 백자송白磁頌: 1999, p.63.

Samsung Culture Foundation, 한국의 미술가 김환기: 1997, p.242.

Youlhwadang, 김환기: 1997, p.64. (detail)

Whanki Museum, 김환기 20주기 회고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94, p.45.

 

 

EXHIBITED

Seoul, Whanki Museum, 김환기 30주기 기념전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1부: 2004.10.12-11.14.

Seoul, Musée Whanki, 김환기 25주기 추모전 백자송: 1999.5.4-7.4.

 

작품설명

김환기의 작품 구분은 제작 시기와 장소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따라 동경시기(일본시기·유학시기), 서울시기Ⅰ, 파리시기, 서울시기Ⅱ, 뉴욕시기로 구분된다. 경매 출품작들은 여러 시기 중 그가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시기로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약 4년의 기간이 해당된다.교수직을 휴직하고 불혹을 훌쩍 넘기고서야 밟아 볼 수 있었던 파리는 젊은 시절의 김환기가 경험해보고 싶은 장소였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기 시작했던 20세기 전반, 유럽은 세계미술의 중심이었고 내로라하는 거장들이 프랑스 파리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유학했던 일본의 많은화가들이 ‘구라파歐羅巴’로 통칭되던 유럽에서 직접 서구의 경향을 경험하고 체화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화가들은 자국이 처한 상황에 묶여 일본 유학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야하는 것이 현실이었다.전란 속에서도 파리행을 생각했던 김환기가 실제로 파리에 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풍족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아낌없이 지불하고 가져와 감상해 마지않던 고미술품들은 모두 조각나버렸으며, 그의 그림은 그가 예상한 가치만큼 팔리지 않았다. 삶의 고달픔을 느끼면서 파리는 그 거리만큼 멀어졌다.

그럼에도 그의 파리행은 그를 예술가로 존중하고 아낌없이 내조를 펼쳤던 아내김향안의 도움이 컸다. 구라파에 다녀오면 미술평론을 해보고 싶다며 종종 프랑스로 가자고 권했던 그녀는 김환기가 프랑스에 가보자고 하자 바로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하며 적극적으로 준비했다. 김환기 보다 1년 먼저 파리로 건너가 화가 및 화상들과 교류했으며, 파리에 도착하여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무리가 없도록 집과 작업실을 마련했다.

아내로부터 준비가 되었다는 연락을받은 김환기는 신사실파 동인들의 후원으로 1956년 2월, 3일부터 8일까지 6일 동안 동화백화점동화화랑에서 도불미전渡佛美展을 가진 후 5월, 파리에 정착했다.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준 아내 덕분에 김환기는 파리 정착 후 세 곳의아틀리에에서 작품을 제작했다. 처음엔 룩상부르그 공원 근처의 아틀리에(Atelier Rue d’Assas)에서 작업하다가 생루이 섬의 아틀리에Atelier L’île Saint-Louis로 옮겨 작업 했으며, 이후 한 번 더 아틀리에를 옮겨 뒤또 거리의 아틀리에Atelier Rue Dutot에서 마지막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했다. 제작에 열심이었던 것만큼 작품 발표도 열심이었다.

파리 체류 중에 총 다섯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파리에도착한 해인 1956년 10월과 이듬해 6월에 베네지트 화랑Galerie M. Bénézit에서 전시를 가졌고 몬테카를로와 니스, 브뤼셀 등지에서도 작품을 선보였으며, 1958년 3월에는 앵스티튀 화랑Galerie de l’Institut에서 전시를 개최하여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적극적으로 발표하는데 혼신의 열정을 기울였다.하루에 10시간에서 15시간을 작업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했던 파리에서의 작품세계는 서울시기와 비교했을 때 급격한 변화를 보이지는 않는다. 기존의 기조를 이어나간 것으로 여겨지는가장 주요한 이유는 소재의 연속성이다.

그가 소중히 여겼던 한국적인 모티프가 파리의 화폭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한국의 화가들이 그 곳의 여러 경향을 받아들여 화풍이 변화했던 통상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파리에서 작품을 소개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우리 것을 돌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김환기는 새롭고 다양한 미술문화에 흔들리지 않고 관조하며 탐색의 시기를 가졌고, 서울시기의 작업을 이어나가며 그 곳에서 익힌 세련된 조형과 색채 감각을 더했다.

이는 아마도 서양 미술의 흐름 속에서 휩쓸리지 않고 독창적이고 고유한 자기존재를 표출하기 위한 작가의노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소재의 확대와 푸른 주조색, 선묘의 활용으로 확인된다. 소재는 십장생과 같은 관념적 소재로까지 그 범위를 넓혔고, 푸른색의 사용을 통해 고국에 대한 상징성과 작가의 심성을 표현했으며, 선묘 통한 대상의 응축을 보여주었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파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장소였다. 파리로 찾아온 많은 거장들이 파리에서비로소 자신을 바라 볼 수 있었고 자신의 색깔이, 자신의 냄새가 어떤 것인지를 인지할 수 있었다.

언젠가 샤갈은 이런 말을 했다. 파리에 나온 자신은 마치 무대 위에 올려져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노라고, 자신을 그처럼 환히 볼 수 있었노라고. 샤갈은 파리에 나오면서 비로소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것, 러시아에서 나온 유태인이란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이 그랬다. 그들은 한결같이 파리에 나와서야 자신이 누구인가를 자각할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김환기의 파리 체류도 자기 발견의 계기였다. 자신이 속해 있는 곳이 어디이며 자신의 고유한 정신이,고유한 노래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오광수(1996), 『열화당미술문고 209 김환기』, Youlhwadang1958년에 제작된 출품작(Lot.43)은 추상화된 자연과 자연의 모습을 담은 백자 항아리가 담겨있다.

전체를 푸른색으로 처리하여 천지의 구분을 없앤 배경에 산등성이와 달, 나무와 항아리를 간결한 선으로 교차시켜 시공간을 초월하는 화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배경처리는 자칫 소재가 화면을 부유하는 느낌을 줄 수 있는데, 배경의 질감을 달리한 섬세한 처리로 사각의 공간을 재구성하여 시각적 집중도를 높이는 효과와 함께 발전된 양상의 면적 구성을 보여준다. 각 소재들은 관념화된 위치와 크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순차적으로 배열되어 리듬감을 형성하고, 집약된 형태로 백자 항아리에 다시 담겨 있다.

성북동 시절, 달도 산협의 달은 다르다며산협의 달빛이 비추이는 마당 한가운데 항아리를 놓아두고 바라보았던 작가의 유희가 파리시기를 지나면서 전통의 현대적 해석, 동양 정서의 발현 등에 대한 연구 아래 심상의 투영이라는 시각을 획득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