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버스 정거장에 붙어 있는 한 광고판에 시선을 빼앗겼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우리나라 조각 보자기의 알록달록한 색상인데, 가까이서 보니 현대 미술의 거장(巨匠)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 지난 3월부터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알리는 광고판이었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든 리히터는 가장 고전적인 작가이면서도 고전을 탈피한 ‘반(反)고전주의’의 기수로 인식되는 예술가다.
그는 2005년에 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독일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의뢰를 받는다. 교회는 그의 명성에 부합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신앙심의 징표를 기대했지만, 정작 리히터는 중세 시대 스테인드글라스의 다양한 색을 72가지 색으로 뽑아낸다. 그리고 창을 가득 채운 이 자유로운 색상들을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1만1500개의 유리 조각에 배치 한다. 물론 이 배치에는 일정한 규칙과 예술가적 권한이 필요했다. 특히 이 방식은 리히터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과 동시에 작업한, 4900개의 에나멜 색채 패널로 만든 ’4900가지 색채'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게르하르트 리히터: 4900가지 색채’의 9번째 버전이 오는 7월까지 서울 청담동에 전시된다. 현대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미 다 봤다고들 하지만, 장소 때문에 선뜻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 전시는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완성한 청담동 에스파스 루이비통 5층에서 열리고 있다. ‘에스파스 루이비통’은 루이비통이 지난해 문을 연 플래그십 스토어다. 프랭크 게리가 한국의 학춤에서 영감을 받았다며 물결치는 곡선으로 완성해놓은 유리 부분이 바로 전시장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현대 거장의 건축에, ‘살아있는 전설’ 작가의 작품 전시라니 이보다 더 좋은 미술관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곳곳에서 반짝반짝 광채를 내뿜는 루이비통 신제품의 끊임 없는 유혹은 짊어져야 할 부담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일찍이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정답을 이야기 했다. “흥미로운 감상을 하려면 정확한 공식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공식이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그 공식을 생각하다 보면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길 겨를이 없을 것도 같다.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자존심과 철학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로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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