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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한국 고미술

삼국지연의도 三國志演義圖 148*49 8폭

by 주해 2022. 11. 5.

2016-09-16 14:35:07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a-h)>

a. 장비가 장판교에서 크게 꾸짖다. (張翼德大鬧長板橋)

b. 제갈량이 유자(儒者)들과 토론을 벌이다. (諸葛亮舌戰群儒)

c. 주유가 적벽에서 화공을 이용해 싸우다. (三江口周郎縱火)

d. 조조가 동작대에서 큰 연회를 베풀다. (曺操大宴銅雀臺)

e. 황충이 계책으로 천탕산을 빼앗다. (老黃忠計奪天蕩山) 

f. 한수에서 조운이 황충을 구하다. (?漢水趙雲救黃忠)

g. 거대한 짐승을 몰아 여섯번째 만병을 파하다. (驅巨獸六破蠻兵) 

h. 제갈량이 서성에서 금(琴)을 연주해 중달을 물리치다. (孔明西城彈琴退仲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는 현재까지 널리 알려진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주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삼국지연의』는 중국 원말명초(元末明初) 시기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1368년경 지은 장편 역사소설로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이다. 조선 건국 이래 명나라와의 사대사행(事大使行)을 통해 경서, 시, 문집은 물론 명대의 유행하던 소설류도 함께 들어왔는데 이 중의 하나가 삼국지였다. 따라서 국내에는 16세기 초?중반인 선조 년간(宣祖, 1552 - 1608)에 전래된 것으로 사료된다. 초기에는 궁중판각(宮刻)으로 간행되었으나 점차 민간판각(坊刻)으로 간행되었는데 민간은 물론 궁중에서도 상당한 유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왕들이 『삼국지연의』의 일화를 그린 그림을 자주 어람(御覽)했던 사실이 『열성어제(列聖御製)』에 실린 숙종(肅宗, 재위 1674 - 1720)과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시에서 확인되는 점과,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 - 1762)의 명으로 화사(畵師) 김덕성(金德成, 1729-1797)이 제작한 『중국소설회모본(中國小說繪模本)』에 『삼국지연의』의 일화가 수록된 정황은 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사회적 영향으로 『삼국지연의』는 18세기에 접어들어 민간에 크게 확산되었으며 과거 시험의 시제(試題)로도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작품이 각 계층에서 활발하게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지연의가 국내에 널리 퍼져 수많은 국역본이 출간된 18-19세기 무렵으로 볼 수 있는데 현전하는 대부분의 작품은 19세기 이후의 것이다. 『삼국지연의』는 대중적인 인기와 함께 작품이 모든 계층에서 선호되어 이에 따라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원결의(桃園結義), 삼고초려(三顧草廬), 적벽대전(赤壁大戰) 등 소설의 내용 중 주요 장면이 정형화되고 도안화되어 하나의 전형을 이루게 되었다. 『삼국지연의도』는 삽화를 비롯하여 화첩, 병풍, 족자의 형태로 그려져 사람들에게 감계(鑑戒)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집안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삼국지연의도』는 조선시대 전국에 퍼졌던 관우 신앙과 관련이 깊다. 관우를 신으로 모시기 위한 관왕묘(關王廟)가 세워지고 이를 장엄하기 위해 다양한 그림이 장식되었는데 『삼국지연의도』도 이 중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명대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일반 서민에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다. 조선에서는 1598년(宣祖 31) 명나라에 의해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관왕묘는 국가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왕이 직접 의례에 참여했고, 고종년간에 이르면 국가제사에 편재된다.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역사박물관 소장의 《삼국지연의도》는 서울에 있었던 남, 동, 북, 서묘의 관왕묘와 관련된 그림으로 그 중요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데 두 기관의 소장품과 본 출품작의 제 1폭과 제 6폭이 도상적 측면에서 상당부분 유사한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두 박물관 소장의 작품은 안드레 에카르트(Eckardt Andre, 1884 - 1974)의 『조선미술사』와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 - 1956)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소개된 작품으로 동관왕묘에서 목격되어 사진으로 남아 소개된 것이다. 관왕묘는 모두 국가에 의해 세워졌고 궁중에서 필요한 회화작품의 경우 도화서 화원들이 동원되었으므로 두 박물관 소장의 작품 또한 궁중화원이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출품작 《삼국지연의도》는 정교한 필치와 섬세한 세부묘사, 청록산수화풍의 화려한 고식(古式)의 채색 방법 역시 궁중회화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인물의 묘사방식이 김홍도의 인물표현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도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작품 상단의 제목은 전형적인 사자관(寫字官)의 글씨체이기 때문에 궁중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동관왕묘와 같이 관우 신앙을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되며 궁중 내부를 장식하거나 하사품의 용도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사한 크기, 도상 및 구성 등에서 상당부분 유사한 작품이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일종의 모본(模本)이 있었을 가능성도 간취된다. 따라서 출품작은 위 박물관의 작품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와 유사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궁중에서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지연의도》는 수량이 많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전해지는 것 또한 많지 않아 본 작품 사료적 가치와 그 중요성이 상당하다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국립민속박물관, 『삼국지연의도』, 국립민속박물관유물보존총서Ⅶ, 국립민속박물관, 2016

국립민속박물관, 『신이 된 관우 그리고 삼국지연의도』, 국립민속박물관, 2016

강수지, 「조선 말기 三國志演義圖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석사학위논문, 2015

서주영, 「朝鮮後期 三國志演義圖 硏究」, 동국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