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유학은 서양·일본을 순결한 조선 더럽히는 짐승과 도적으로 봐...신탁통치 논란 때 임정도 비슷… 미군정을 침략으로 보고 반대하지만 그 결과는 공산 세력 득세, 신냉전 몰아치는 지금은 난세...역사에서 얻은 지혜를 자각해야...
臨政 애국자들과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1945년 12월 30일 새벽, 서울 원서동에서 총성이 울렸다. 한국민주당 당수 고하 송진우가 암살되었다. 3·1운동의 주역으로, 일제와 줄기차게 싸운 민족 지도자였다. 그런 애국자가 왜 해방 후 첫 암살 대상이 되었을까? 정치 노선이 문제였다. 해방 후 송진우는 세 가지 정치적 입장을 천명했다. 자유민주주의, 임정 봉대, 미군정 인정이다. 새로운 국가를 세울 원칙이었다.
해방 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체제 선택이었다. 1946년 8월, 서울 시민 1만명을 대상으로 한 미군정청 여론조사를 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지지율이 총 77%에 달했다. 다수 지식층도 공산주의를 인류의 희망으로 여겼다. 하지만 송진우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했다. 1인이나 한 계급의 독재가 되면, 국민의 “생명, 재산과 자유가 보장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건국의 주체가 될 것인가’ 역시 핵심적 과제였다. 송진우는 인공에 맞서 임정을 지지했다. 하지만 신탁통치를 놓고, 임정과 정면충돌했다. 1945년 12월 말, 신탁통치안이 알려지자 분노의 물결이 한반도를 휩쓸었다. 12월 29일, 좌우를 망라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김구의 숙소 경교장에 모였다. 신탁통치 문제로 밤새 격론이 벌어졌다. 김구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다”며 격정을 토로했다. 강원룡 목사에 따르면, “모두들 소리소리 지르고 난장판이 벌어지는데, 그저 흥분해가지고 서로 욕설을 하고 이렇게 야단”을 쳤다.
그런데 송진우가 일어나 침착하게 “민족의 대계가 아니냐. 그런데 우선 여기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문 원문을 읽은 분이 있느냐. 민족의 영도자들이 그 원문 내용을 모르고 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그 역시 반탁주의자였지만, 만약 5년 내 통일 정부가 가능하다면 신탁통치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역설했다. 미군정에서도 “탁치는 침략이 아니라 독립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의 원조와 후견을 의미하는 것이니, 한민족은 냉정하기 바란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와 미군정을 침략으로 본 임정은 미군정에 불복하라는 포고문을 발했다. 송진우는 미군이 최소 2년은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군이 떠나면 조직화된 공산 세력이 권력을 쥘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송진우가 옳았다. 미군이 떠난 뒤 6.25전쟁이 일어났다. 지난해 말, 일론 머스크는 한반도의 야간 위성사진을 엑스에 올렸다. 사진의 제목 ‘낮과 밤의 차이’처럼, 남쪽은 휘황찬란하게 빛나지만, 북쪽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그 놀라운 차이는 1948년 체제 선택의 결과였다. 대런 모글루의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도 남북한을 대표적 사례로 소개했다.
그런데 왜 임정의 애국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실패했는가? 역사의 현실을 오독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이후, 한국인이 직면한 최대의 사상적 문제는 ‘세계(world)의 이해’였다. 한말의 저명한 의병장 면암 최익현은 서양이 “중화를 오랑캐로, 인류를 금수로 만들었다”고 개탄했다. 수운 최제우는 ‘요망한 서양 도둑(西洋賊)’이라고 보았다. 유학과 동학이 본 당시의 ‘세계’는 서양과 일본이 순결한 조선을 더럽히는 짐승과 도적이라는 것이었다. 1876년 신사유람단을 따라 처음 일본을 방문한 유길준은 비로소 세계가 “일찍이 나 혼자 추측하던 바와 같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의 저서 <서유견문>은 ‘세계’의 발견에 대한 한국인의 첫 종합 보고서이자, 미래 한국이 나갈 지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