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독재자’ ‘페루 영웅’ 두 얼굴 가졌던 前대통령
방탄 조끼를 입은 알베르토 후지모리(가운데) 전 페루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1997년 4월 수도 리마의 일본 대사관저에서 인질 구출 작전을 지휘하는 모습. 암 투병 끝에 11일 별세한 그는 대통령 3연임에 성공하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각종 범죄 사실이 드러나 몰락했다. /AFP 연합뉴스
1990년부터 10년간 페루를 통치했던 일본계 지도자 알베르토 후지모리(86) 전 대통령이 11일 암 투병 중 사망했다. 집권 기간 ‘경제 발전의 주역’ ‘테러에서 국가를 구한 영웅’ ‘부패한 독재자’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각인됐던 그는 퇴임 이후에도 페루 현대 정치에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공(功)과 죄(罪), 양면에서 페루 사회를 뒤흔드는 존재였다”고 보도했다.
후지모리는 1938년 수도 리마의 재봉소집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이름은 후지모리 겐. 4년 전 구마모토현에서 페루로 이주한 부모가 그의 출생을 일본공사관에 신고하면서 일본 국적도 함께 얻었다. 페루 국립농과대를 나와, 프랑스·미국에서 유학한 뒤 돌아와 모교 학장을 맡았다. 1987~88년 페루 국영TV의 토론 프로 사회자를 맡으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리마의 선거 혁명’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국제사회에 충격을 줬다. 인지도는 있었지만 정치 경력은 없었던 그는 1990년 급진 우파 성향 신당 ‘혁신90′을 결성해 대선에 출마했다. 결선투표 끝에 훗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유명작가이자 유력 정치인이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
당시 페루는 군사 쿠데타와 극좌 단체의 테러로 얼룩진 정치 혼란기가 반세기 가까이 계속되고 있었고 국민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신음하고 있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기존 정치인에게 신물 난 페루 국민이 ‘일자리·과학기술·근면’을 내건 학자 출신의 일본계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1992년 11월 21일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이 리마에서 열린 한 도로의 개통식에서 군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후지모리는 임기가 시작되자 국유 재산 매각, 불합리한 규제 개정, 해외 자본 유치 등 전방위적 경제 개혁을 주도했다. ‘후지모리 쇼크’라고도 불렸던 정책이 고속 성장과 물가 안정과 해외 교역량 증대 등의 성과를 냈고, 페루인들은 ‘우리도 일본처럼 발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한 집권 여당 의석 수는 그가 독재자로 변모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혁신90은 상·하원 모두 합쳐 46석에 불과한 제3당이었고 집권 내내 거대 야당의 견제에 직면했다. 그는 이런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1992년 군부를 끌어들여 ‘친위 쿠테타’를 감행,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듬해 대통령 연임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바꿨고, 1995년 재선에 도전해 64%의 지지율로 압승했다.
1996년 12월 극좌 게릴라인 투팍아마르혁명운동(MRTA)이 일본 천황 생일 축하 리셉션이 열리고 있던 리마의 일본 대사관저를 습격해 넉 달 가까이 인질극을 벌이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후지모리 정권 최대의 위기였지만 그는 이듬해 4월 특공대를 투입해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인질 1명과 특공대원 2명이 희생됐지만 나머지 인질 71명을 구출하고 인질범 전원이 사살됐다. 진압 작전 때 방탄조끼를 입은 그가 직접 현장을 누비며 군경을 격려하는 사진이 보도되면서 후지모리는 ‘테러를 진압한 영웅’으로 강력하게 각인됐다.
이후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던 그의 몰락은 대통령 3선 도전에 성공한 직후인 2000년 9월 시작됐다. 핵심 측근인 대통령실 정보보좌관이 야당 의원을 돈으로 매수하는 동영상이 공개된 것이다. 그의 권위주의적 행태에 반발하던 민심이 일거에 폭발했다.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자 페루 국회는 그의 임기를 2001년까지로 대폭 단축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후지모리는 식물 권력으로 빠르게 전락했다.
힘이 빠지면서 어두운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극좌 게릴라 소탕이란 명분으로 수십 명의 시민과 대학생을 살해하는 데 관여했으며, 정권 비판적 언론인을 살해 협박하거나 국적을 박탈하고, 스페인어가 서툰 27만여 명의 여성 원주민에게 강제 불임 수술을 자행했다는 폭로가 잇따랐다.
부패한 독재자로 추락을 거듭하던 후지모리는 자신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이 높아지자 나라를 등지고 부모 고향으로 도피하는 선택을 했다. 2000년 11월 브루나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 뒤 귀국하지 않고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 도착 이틀 뒤 페루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냈고 그로부터 나흘 뒤 국회는 대통령직을 박탈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 국적자라는 이유로 인권탄압·부패 혐의를 받는 후지모리의 체류를 허용하며 페루인들의 반발을 샀다.
후지모리는 일본에 머물면서도 권좌 복귀를 시도했다. 대선 출마를 준비하기 위해 2005년 11월 칠레에 갔다가 현지 경찰에 체포돼 가택 연금됐다. 2007년 페루로 신병이 인도됐고 살인·납치·부패 등 혐의로 2009년 징역 25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2017년 페드로 파블로 쿠진스키 당시 대통령은 건강 악화를 이유로 그를 사면했다. 하지만 2018년 페루 법원은 그의 사면을 취소해 다시 투옥시켰고, 2022년엔 페루 헌법재판소가 사면 결정을 되살리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작년 12월 출소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이 2023년 12월 6일 리마 동부 외곽의 바르바딜로 교도소에서 출소한 모습. /AFP 연합뉴스
24년 전에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후지모리의 존재는 페루 정치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후계자인 딸 게이코(49)는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세 차례 대선에서 고속 성장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진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지만, 결선 투표에서는 반(反)후지모리 정서에 번번이 발목이 잡혀 박빙의 표차로 낙선했다. 후지모리는 지난 7월에는 게이코를 통해 ‘2026년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뒤 페루 대통령실은 소셜미디어에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유족의 깊은 아픔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관방장관은 “그의 평가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재임 중 일본을 여러 차례 방문해 양국 관계 강화에 힘썼고, 일본 대사관저 점거 사건에선 테러에 굴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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