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미술/한국 고미술

광개토대왕릉비탁본첩 廣開土大王陵碑拓本帖-rubbing on paper - 18.0☓33.3cm (8volumes)

by 주해 2022. 11. 23.

2020-03-03 22:25:42

 

 

廣開土大王陵碑拓本帖

고구려 장수왕 3년414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가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19세기 말1876-1880이었다. 비 발견 후 곧 탁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탁본은 약 100본本 정도이다. 그러나 같은 비로부터 채탁한 탁본이지만 다양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 원인은 엄밀한의미에서는 탁본이라 부를 수 없는 것에서부터 비면에 석회를 바른 후 채탁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능비 탁본이라 불리어지는 것에는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 원석탁본原石拓本, 석회탁본石灰拓本 등이 있다.

묵수곽전본은 비면에 종이를 대고 탁본을 뜬 후 그 탁본을 보아가면서 문자를 석독하고, 그 위에별지를 대고 베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탁본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제작과정에서 원석탁본이 만들어 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묵수곽전본을 만들기 위한 시료였지 완성품은 아니다. 1883년에 일본인 사꼬오 카케노부酒匂景信가 입수한 사꼬오본酒匂本, 東京국립박물관 소장은 이 방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비면에 아무것도 가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채탁한 탁본을 원석탁본이라 한다. 종이를 물에 적셔, 비면에 강하게 부착하여 채탁하기 때문에 현무암질 화산암의 거친 표면이 석화石花, 흰 반점로서 종이에 반영된다든지, 비면의 요철凹凸이 그대로 탁지에 표현되어 나타난다. 북경대학 도서관 A, B, C, D본과, 청명본, 대만의 부사년본, 일본의 미즈타니본水谷本, 가네꼬본金子本 등이 이에 해당한다.

능비 탁본이 세상에 알려지자 탁본을 구하려는 사람이 많아지게 된다. 이에 탁본의 양산과 명확한글자를 요구하는 수요자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석회탁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1890년 무렵부터 대를 이어 채탁 작업을 한 초균덕初均德이 1938년 무렵 현지를 떠날 때까지 약 50년 가까이 행해진 석회탁본 제작은 현재 남아있는 탁본의 대다수를 이룬다. 석회탁본 가운데 탁출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으로서는 샤반느본1907, 동경대학 건축사본1913, 천리대학 소장의 이마니시 류今西龍 구장본1913, 큐주대학九州大學 소장본1928과 나이토內藤確介 구장본1927-1929 등이 있다.

본 작품은 비록 석회 탁본이긴 하지만 석회로 인한 왜곡이 매우 적은 탁본이다. 학술적 가치도 있을뿐만 아니라 서체 연구에 있어서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Ⅰ-3-27字(1면의 3째줄 27번째 글자)는북경대 도서관 A-D본이나, 청명본 등의 원석탁본에서는 “天”字이다. 그런데 본 전첩본에서는 “天”〈참고1〉으로 볼 수 없다. Ⅰ-3-41字도 원래 “履”이나 여러 석회 탁본에서는 “黃”으로 탁출되어 있다.

탁본에서는 “黃”〈참고2〉자의 윗부분이 보이고 있다. 이는 본 탁본이 석회 탁본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초기에 탁출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본 탁본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첩본과 매우 유사하지만, 그 보다는 약간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석회탁본은 형성기(1890-1899)와 전성기(1900-1920년대 후반)로 구별할 수 있는데, 본 탁본은 자획의 변화 정도와 타본들과의 비교를 통해 보았을 때, 전성기 초반(1900-191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대왕이 재위하던 시기 호칭은 영락대왕이었고, 사후 세워진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묘호가 등장하는데 이를 줄여서 광개토대왕이라 부르는 것이다.

국강상은 도성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무덤이 있던 장소를 가리키며 광개토경평안은영토를 넓게 개척해 백성을 편안하게 살도록 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마지막의 호태왕은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참고 도판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첩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