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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문화 . 시사

광개토왕릉비 1880년 재발견 전까지 금나라 유적이라 여겨

by 주해 2022. 11. 4.

      1880년 재발견 전까지 금나라 유적이라 여겨

 

1880년 재발견 전까지 금나라 유적이라 여겨

1880년 재발견 전까지 금나라 유적이라 여겨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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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재발견 전까지 금나라 유적이라 여겨

 

조선일보 2016-06                                                      

 
 

광개토왕릉비는 높이 6.39m, 너비 1.3~2.0m로 위와 아래가 허리 부분보다 약간 넓다. 원석 네 면의 울퉁불퉁한 표면에 글자를 새겼다.



무게 37t의 거대한 비석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영토가 대부분 다른 민족의 손에 넘어간 후 점차 우리 민족의 기억에서 잊혔다. 그러다가 비석이 우리 문헌에 등장한 것은 1445년 '용비어천가'였다. '평안도 강계 서쪽에 강을 건너 140리에 너른 평야가 있다.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는데 금나라 황제의 성이라고 한다. 성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비가 있고, 또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기가 있다.' 이것은 이성계가 고려 말인 1369년 압록강을 건너 원정하는 길에 집안 일대를 통과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국내성과 광개토왕릉비 등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금나라 유적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1487년 평안도관찰사 성현은 국경 지대를 시찰하던 중 압록강 건너편 비석에 대해 '천척(千尺)의 비가 홀로 우뚝 서 있다… 글자를 읽을 수 없음이 한스럽다'는 한시를 남겼다. 1595년 후금(後金)과의 교섭을 위해 만주를 찾은 신충일은 귀국 보고서에 집안 지역의 황성(皇城), 황제묘와 거대한 비석에 대해 적었다. 그 역시 광개토왕릉비를 금나라 황제의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중원을 차지한 뒤 1677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일대의 출입을 금지했다. 집안도 봉금(封禁) 정책으로 사람이 드물어지면서 비석의 존재도 잊혔다. 그러다 청나라가 1876년 봉금 정책을 해제하자 농민들이 밀려들었고, 1880년 무렵 한 농부가 이끼와 넝쿨에 덮여 있는 비석을 발견했다. 지방 당국이 탁본을 뜨고 이것이 베이징에 전해져 내용이 판독되면서 비석 주인공이 고구려 광개토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공동 기획: 한국고대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