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재발견 전까지 금나라 유적이라 여겨
1880년 재발견 전까지 금나라 유적이라 여겨
조선일보 2016-06
광개토왕릉비는 높이 6.39m, 너비 1.3~2.0m로 위와 아래가 허리 부분보다 약간 넓다. 원석 네 면의 울퉁불퉁한 표면에 글자를 새겼다.
무게 37t의 거대한 비석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영토가 대부분 다른 민족의 손에 넘어간 후 점차 우리 민족의 기억에서 잊혔다. 그러다가 비석이 우리 문헌에 등장한 것은 1445년 '용비어천가'였다. '평안도 강계 서쪽에 강을 건너 140리에 너른 평야가 있다.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는데 금나라 황제의 성이라고 한다. 성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비가 있고, 또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기가 있다.' 이것은 이성계가 고려 말인 1369년 압록강을 건너 원정하는 길에 집안 일대를 통과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국내성과 광개토왕릉비 등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금나라 유적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1487년 평안도관찰사 성현은 국경 지대를 시찰하던 중 압록강 건너편 비석에 대해 '천척(千尺)의 비가 홀로 우뚝 서 있다… 글자를 읽을 수 없음이 한스럽다'는 한시를 남겼다. 1595년 후금(後金)과의 교섭을 위해 만주를 찾은 신충일은 귀국 보고서에 집안 지역의 황성(皇城), 황제묘와 거대한 비석에 대해 적었다. 그 역시 광개토왕릉비를 금나라 황제의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중원을 차지한 뒤 1677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일대의 출입을 금지했다. 집안도 봉금(封禁) 정책으로 사람이 드물어지면서 비석의 존재도 잊혔다. 그러다 청나라가 1876년 봉금 정책을 해제하자 농민들이 밀려들었고, 1880년 무렵 한 농부가 이끼와 넝쿨에 덮여 있는 비석을 발견했다. 지방 당국이 탁본을 뜨고 이것이 베이징에 전해져 내용이 판독되면서 비석 주인공이 고구려 광개토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공동 기획: 한국고대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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