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9 11:43:20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08/2018040801978.html
[최보식이 만난 사람] "순박한 사람들이 짐승처럼 변해… 집단 이념이 個人을 파괴하는 걸 목격"
[제주 4·3사건의 '허위'와 외롭게 맞선… 제주 출신 원로작가 현길언]
"부끄러운 역사일수록 그럴듯하게 분칠하려고 해
세월 지나 분칠 떨어지면 그 모습 더 추악해져"
"4·3은 정치 논리가 됐다… 정치인은 이득을 노리지만
역사 전공한 사람들이 동조하는 건 이해 안 돼"
제주 4·3 사건(1948~1954년)의 희생자는 1만4000여 명으로 기록돼 있다. 전쟁이 아닌 한 지역 안의 대결에서 이렇게 많은 인명이 살상된 적은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 4·3 사건 70주년 추념사에서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고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라고 했을 때, 제주 출신 원로작가 현길언(78)씨가 그런 낡은 이념의 사람일 것이다. 현씨는 2013년 한 학술계간지에 '과거사 청산과 역사 만들기―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중심으로'라는 글을 썼고, 이듬해에는 '정치권력과 역사 왜곡'이라는 책을 냈다. 그의 결론은 이랬다.
"진상조사보고서는 정치 권력자의 이념을 뒷받침하는 정치 문서로 만들어졌다. 그들의 정치 이념을 구현해 보려고 이 사건을 이용한 것이다. 제주 4·3 사건은 의로운 저항이나 봉기가 아니라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일으킨 반란이었다."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현길언씨는 “남로당이 일으킨 반란을 어떻게 이념을 떼놓고 말할 수 있나”라고 말했다.
―선생은 작가인데 왜 소설이 아닌 학술적인 글을 썼나?
"노무현 정부 시절 '4·3 사건 정부진상조사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이 작업에 참여한 실무자 중에는 내 고교 제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조사보고서가 1980년대 학생 동아리의 인쇄물 수준이었다. 답을 정해놓고 거기에 짜맞췄고 논리도 부족했다. 하지만 4·3 사건이 권력화·정치화되면서 감히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보고서 내용이 진실이 될 것 같았다."
―그 일로 숱한 곤욕을 치르면서, "내가 어렸을 때 겪은 그 '광란(狂亂)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는데?
"제주의 일부 언론과 4·3 관련 단체들은 '4·3을 폄훼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논리를 뒤덮어버렸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항의하거나 욕설 전화를 걸어오진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말을 해줘 고맙다'고 했다."
―선생은 4·3 사건을 체험했지만 개인 체험에는 한계가 있다. 선생이 보고 겪은 것만이 4·3 사건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나?
"제주 4·3은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다. 체험만 아니라 오랜 기간 현장 취재와 자료 조사를 해왔다. 역사적 사건이란 시작과 중간, 끝이 있다. 이를 총체적으로 봐야 한다. 지금은 어떤 한 부분, 정당한 민중 봉기를 미군정(美軍政)과 그 하수인 이승만 정권이 탄압해 비극을 극대화시켰다는 틀에서만 얘기하고 있다. 남로당에 의해 기획된 4·3의 발발 동기는 지우려 하거나 순수한 항쟁으로 변조하고 있다."
―4·3 사건을 '남로당 반란'으로 규정짓는 것에 대해, 문 대통령은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다"고 했는데?
"진압 과정의 반인권적 행위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막으려는 남로당의 반란을 정당화할 수 없다. 또한 남로당이 주도했다 해도 진압 과정의 반인권적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 발발 동기와 진압 과정은 분리해야 한다."
―4·3 사건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의 발포로 수명의 민간인이 숨지는 불상사로부터 촉발됐다. 공권력의 과잉 탄압이 빌미를 준 게 아닌가?
"단순히 3·1절 기념행사가 아니라 남로당 세력을 확장시키려고 했던 정치 집회였다. 미군정이 집회를 불허했지만 이들은 가두행진을 강행했다. 질서 유지를 위해 출동한 경찰 기마병의 말(馬)에 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생겼다. 흥분한 군중이 경찰서에 난입하려고 하자 발포가 있었다. 긴급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남로당 행사로만 규정할 수 있는가. 남로당과 관계없는 군중이 더 많이 참가했는데?
"당시 남로당 문서에는 자신을 '부대(部隊)'로, 경찰을 '적(敵)'으로 구분한 가두행진 계획이 나와 있다. 남로당의 지령서, 행동강령, 활동보고서는 그 집회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직후 남로당은 '3·10 총파업'을 지령했다. 제주도 공무원과 직장인 중 95%가 동참했다. 심지어 경찰도 부분적으로 가담했다. 미군정은 제주도민 전체가 남로당에 넘어갔다고 봤을 것이다. 육지에서 응원(應援)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들어왔다. 남로당원과 파업 참가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500여 명이 체포됐고, 그 과정에서 고문치사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무장대원들이 도내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우익 인사와 선거 담당자들을 테러하는 4·3 사건이 터졌는데?
"진상보고서는 이를 '무장 봉기'라고만 했다.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와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남로당의 폭동임을 입증해주는 삐라나 성명서 등을 무시하고 있다. 당시 학교 가는 길에는 '미군을 몰아내자' '인민들은 함께 나가 싸우자' '박헌영(남로당 당수)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쓰타린 원수 만세!' 같은 먹물 삐라가 붙어 있었다. 정부가 수립돼 군경토벌대가 들어온 그해 9월까지 테러는 계속 됐다. 이들은 본인이 없으면 노모나 부인을 발가벗겨 매달아 걸기도 했다."
―그건 군경토벌대의 잔혹한 만행으로 보도됐는데?
"좌익 테러단이 먼저였다. 이런 사실이 가려져 있다."
―선생의 집안은 토벌대 편에 섰던 것은 아닌가?
"내 부친은 남로당원 친구와 가깝다는 혐의로 경찰에 붙들려간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하루 동안 토벌대에 의해 세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삼촌 중 한 명은 경찰관이 됐다. 두 명의 삼촌과 외삼촌, 이모부는 빨치산이 됐고 나중에 처형됐다. 한 집안에서도 이렇게 얽혀 있었다."
―군경토벌대에 의한 양민의 피해가 훨씬 컸다. 수많은 마을이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는데?
"토벌대는 마을 사람들을 빨치산과 결탁된 것으로 봤다. 그래서 마을 가옥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보면 사살하거나 체포했다. 마을 사람들은 토벌대가 두려워서 산으로 피신했다."
―전쟁 상황에도 양민을 향해 그렇게 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데.
"빨치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를 태웠고 시도 때도 없이 테러를 일삼았다. 할머니는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죽창에 맞았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끼고 도망치다가 힘에 부쳐 '나라도 살아야 시신을 수습할 것이 아닌가'라며 소나무 아래에 뒀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이 얘기를 수도 없이 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었다."
―그럼에도 선생은 4·3 사건을 국가 공권력의 불법성보다 '남로당의 반란'에 더 주목하는 이유가 뭔가?
"그 비극을 처음 만든 쪽이 남로당이었기 때문이다. 내 외삼촌은 소학교를 나와 농사짓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한 달만 있으면 제주도가 새롭게 된다'고 말했다. 허황한 이념에 물들어 남로당의 동조자가 된 것이다. 평소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 짐승처럼 변해 이웃을 잔혹하게 테러했다. 집단 이데올로기가 죄 없는 개인을 얼마나 파괴하는가를 내 눈으로 본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념을 떠나서 4·3 사건을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남로당이 일으킨 반란을 어떻게 이념을 떼놓고 말할 수 있나. 그 핵심 분자들이 사상과 관계없던 주민들을 꾀고 협박해 당원으로 만들었고 이들을 앞세워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던 것이다."
―같은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씨의 '순이삼촌'(1978년)은 4·3 사건을 처음으로 다룬 소설이다. 토벌대에 의해 한 마을 주민이 몰살되는 내용으로, 불법적 국가 폭력에 대한 고발이다. 이번 4·3 추념식에 그는 초청받았고 문 대통령이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는 고교 때 연합 문학 서클 후배였다. 상당히 친했다. 당초 그는 순수문학으로 출발했는데…, '순이삼촌'은 4·3의 비극성을 전한 것이지, 역사적 인식이 담긴 작품은 아니라고 본다. 그에게는 토벌대에 의해 피해를 당한 장면만 각인됐던 것 같다."
―두 분이 4·3 사건에 대해 함께 대화해본 적 있나?
"그런 적은 없었다. 수십 년 전부터 거의 만나지 못했다. 1980년대 초 그가 소개해줘 어린이용 책 '제주도 이야기'를 창비 출판사에 냈다. 문 대통령이 역시 높게 평가한 '동백꽃 지다'의 화가 강요배가 당시 그 책의 삽화를 그렸다. 강요배는 내 제자였다."
―선생과 관계된 후배나 제자들은 '4·3 사건은 민중 봉기이고 통일 운동'이라는 쪽에 서 있는데?
"소원해진 제자들이 있다. 하지만 내 작가적 양심으로는 역사적 사실이 변질 왜곡되는 걸 방관할 수 없었다. 처음 4·3 사건의 보상과 명예 회복 논의는 연좌제에 걸려 불이익을 받거나 제주도민은 전부 폭도(暴徒)라는 시선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훼방하기 위한 남로당의 반란을 '봉기' '의거' '민중 투쟁'으로 역사적 성격까지 바꾸려고 한다. 이번 70주년을 기해서 '4·3 정명(正名)운동'을 벌이고 있다. 4·3 사건의 정당성을 일반에게 공인받겠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앞장서고 다수 군중이 묵인하면 4·3 사건은 그런 역사로 기록되지 않겠나?
"4·3은 완전히 정치 논리가 됐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럴 수 있지만,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장차 헌법 개정 때 전문(前文)에 4·3 사건을 넣겠다고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까지 흘러왔는지 나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일어서려니까, 그는 이 말을 꼭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부끄럽고 참담한 역사일수록 그럴듯하게 분칠하려고 한다. 세월이 지나 분칠이 떨어지면 그 모습은 더 추악해진다.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그 시절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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