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字' 해석에 달라지는 고대 韓·日 관계… 100년 넘게 양국 논쟁
광개토왕릉비문 논란
'20字' 해석에 달라지는 고대 韓·日 관계… 100년 넘게 양국 논쟁
414년 고구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비석을 수도 국내성에 세웠다. 그로부터 1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1880년 무렵 재발견된 이 비는 오늘날 국제적 논쟁거리의 하나가 되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1775자가량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문헌 자료에 없는 많은 역사상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광개토왕릉비문이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 핵심은 '신묘년(辛卯年)' 기사이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신라·가야 및 왜(倭)가 맺고 있던 국제 관계가 20자(字)란 아주 짧은 문장에 담겨 있으며,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대의 한·일 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비문이 재발견된 초기부터 일본은 신묘년조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와서 백잔(백제)과 □□□羅(가라·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라는 판독과 해석을 통해 '임나일본부설(說)'의 근거로 삼았다. 이에 정인보는 이 문장에서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되었다는 이른바 '고구려 주어설'을 주장했고, 박시형·김석형·정두희 등의 다양한 해석으로 이어졌다. 고구려가 왜를 격파하였다거나 고구려가 백제·신라 등을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가운데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가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비문을 변조했다고 주장하면서 비문 연구는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그리고 1981년 중국의 왕젠췬(王健群)이 현지 중국인 탁본공에 의해 석회가 발라지고 비문이 변조됐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지금은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 만들어진 원석(原石) 탁본을 비문 연구의 주자료로 삼고 있다. 특히 그동안 '海'로 판독되었던 글자는 변조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원석 탁본에 의거해 '每' '泗' '浿' '沺' 등 여러 글자로 판독하여 해석이 분분하다.
글자 판독만이 아니라 문장 해석도 각양각색이다. 많은 견해가 당시에 결코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을 수 없다는 정황론을 전제한다. 하지만 비문이 반드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보장도 없다. 예컨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오랜 속민(屬民)이라는 비문 기사부터 과장되어 있다. 그래서 기왕의 판독대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되 이는 고구려가 백제 정벌의 명분으로 내세우기 위해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신묘년 기사는 사실이 아니라 당대 고구려인의 필법에 따른 허구라는 관점이다. 또 비문에 보이는 여러 민(民)의 용례가 '고구려 태왕(太王)의 민'이란 의미라는 점에 근거하여 신묘년조에 기록된 신민(臣民)의 주체 역시 고구려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같이 당대 고구려인의 시각에서 비문을 해석하는 근래의 연구는 '훈적비(勳績碑)'라는 본래 성격을 고려할 때 매우 유효한 연구 방법이다.
신묘년 기사는 문자 판독과 문장 해석, 역사상 이해가 서로 충돌하면서 판독문을 확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무엇이 정답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이제는 신묘년 기사에 집착하기보다 비문 전체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비문에는 거란·숙신·후연 등을 포함한 당시 동북아 전체의 역사를 그려볼 수 있는 단서가 담겨 있다. 천하관(天下觀) 등 동북아 최고 수준의 고구려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내용도 풍부하다. 그럼에도 20자의 신묘년 기사에 가려 나머지 1750여자에 담겨 있는 역사상이 아직 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는 1500년 전 고구려인이 쓴 광개토왕릉비문을 근대 한·일 관계사를 재구성하는 텍스트로 이용한 결과이다. 이에 대한 성찰에서 비문 연구가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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