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家 장녀’ 김선정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
“제가 남매 중 제일 아버지하고 닮았대요. 사교성 없고 융통성 부족한 것까지도요(웃음).” 광주 비엔날레 전시관에 설치된 작품 앞에 선 김선정 대표. 입매와 뿔테 안경 너머 눈매까지 아버지 김우중 회장과 똑 닮았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이나 도와주지 미술관은 무슨 미술관이야?” 아버지는 미술에 매달리는 어머니와 딸을 마뜩잖아 했다. “아버지가 도피해 계시는데 제발 조용히 있으면 안 되겠니? 네가 전시할 때마다 회사 얘기가 자꾸 언론에 나오잖아.” 대우 사태 이후엔 어머니까지 말렸다. 맏딸은 완강했다. 세상 떠난 남동생 이름 내건 미술관(아트선재센터)을 접을 순 없었다. 재벌 총수에서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 된 부모 대신, 죄인처럼 몰래 동생 유골을 강물에 뿌리던 밤을 잊을 수 없었다. 그에게 동생 ‘선재’는 미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겉에선 부모 덕에 이 길을 쉽게 걸어온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녹록지 않은 길이었어요. 집은 거짓말처럼 망했고요.” 김선정(56) 광주비엔날레 재단 대표가 헛웃음을 지었다. 초탈한 표정이었다. 국내 미술계 수퍼 파워로 꼽히는 그는 고(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큰딸. 다부진 입매, 안경 너머 눈매까지 김 회장과 똑 닮았다. “남매(3남 1녀, 장남 사망) 중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았어요. 외모도, 성격도.”
고상한 취미로 미술 작품을 모으는 ‘회장님 딸'이 아니라, 30년 일해온 실력파 전시 기획자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2005), 서울 국제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 총감독(2010), 광주 비엔날레 공동 예술감독(2012)…. 국내 주요 미술 행사를 총괄했다. 국제적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국제 미술 잡지 ‘아트 리뷰’가 선정한 2020년 세계 미술계 ‘파워 100’에서 72위에 꼽혔다. 2013년 처음으로 이 리스트에 들어간 이후 2016년만 빼고 줄곧 포함됐다. 두터운 글로벌 인맥을 바탕으로 스타 미술가를 키워내는 예술계 미다스의 손이기도 하다. 이불·양혜규·김성환 등 스타 작가가 김선정이 기획한 전시를 교두보로 해외 무대로 나갔다.
그가 수장으로 있는 광주비엔날레가 1일 개막했다. 코로나 때문에 지난해 9월 예정이었던 행사가 두 차례 미뤄진 끝에 겨우 막을 올렸다. 개막 일주일 전, 광주에서 김선정을 만났다.
지난 2월 어머니 정희자(81)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자서전(‘내 마음에 비친 나의 모습’)을 내놓으며 대우 비사(祕史)를 슬며시 풀어놔서일까. 미술 외에 가족 얘기는 좀처럼 안 하던 대우 가(家) 장녀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쏟아냈다.
◇부모님 후광? 반은 맞고 반은 틀려
광주비엔날레 장외 전시가 열리는 옛 국군광주병원. 깨진 유리 조각이 바닥에 널려 있고 문짝은 뜯어져 나가 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때 다친 사람들이 치료받던 옛 병원 건물에 일본 작가 시오타 지아루, 한국 작가 임민욱 등의 작품이 설치돼 있었다. 김선정은 4년 전 비엔날레재단 대표를 맡으면서 이곳을 예술 무대로 삼았다.
–폐허 전문인가. 옛 서울역사(현 문화역 서울 284), 옛 기무사터(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도 기획전 ‘플랫폼 서울’을 통해 예술 실험을 하지 않았나.
“예술 리모델링 전문가라는 사람도 있다(웃음). 버려진 장소에 깃든 역사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1980년대를 산 사람이라서 그런지 사회, 정치 환경에 저절로 반응하게 된다.”
–올 비엔날레 주제가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이다. 무슨 뜻인가.
“서구의 합리성과 이성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비서구권에 남아있는 전통적인 지혜를 가져오자는 의미를 담았다.”
–며칠 전 뉴욕타임스에서도 크게 주목했을 정도로 세계적 비엔날레가 됐지만, 일반 관객 입장에선 여전히 거리가 있다.
“큐레이터로 기획에 참여하지 않고 대표로서 한 발짝 떨어져 보니 그런 아쉬움이 보이긴 한다.”
1965년 김우중 회장과 아내 정희자 여사가 갓 태어난 첫딸 김선정을 안고 있는 모습. /김선정 제공
–미술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했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미술사를 배우겠다며 우리 남매를 놔두고 유학(미 하버드대)을 떠나셨다. 어머니 친구가 대신 챙겨줬는데 그 집 딸이 미술로 예원학교를 준비했다. 덩달아 나도 학원에 다니다가 예원에 합격했다. 이후 서울예고, 이화여대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 작가로서 열정이 없더라. 그 길을 계속 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대학 4학년 때 남편(김상범 이수그룹 회장)과 결혼하고 유학(미 크랜브룩 미술대)을 갔다.”
–어머니는 커리어 우먼으로 더 일하다가 결혼하기를 바랐다던데?
“부모님은 너무 일찍 결혼하는 것 아니냐며 처음엔 반대하셨다. 난 결혼으로 보수적인 집안에서 일단 탈출부터 하고 싶었다. 대우라는 회사의 무게, 사람들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남편은 집안끼리 친해 어려서부터 알던 오빠. 만화방에서 함께 만화 보며 방황하던 나를 붙잡아 줬다(웃음). ”
–전시 기획은 어떻게 하게 됐나.
“1990년대 초 뉴욕에 살 때 백남준 선생님을 만났다. 어머니가 미술관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백 선생님이 데이비드 로스 당시 휘트니미술관 관장을 연결해줬다. 1년간 그 미술관에서 인턴을 했다. 관장실부터 미술품 구매 담당 부서까지 구석구석 돌며 실무를 익혔다. 백 선생님은 내게 큐레이터의 길을 보여준 스승이자 멘토다.”
–국내로는 언제 들어온 건가.
“1993년 백 선생님이 휘트니 비엔날레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가져오셨다. 해외 미술인들과 영어로 소통하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때만 해도 영어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내 영어 실력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떠듬떠듬 통역하면서 보조 큐레이터를 했다.”
–백남준을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부모님 덕을 본 부분은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미술 활동을 도와주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미술을 사치라고 여겼다. ‘휘트니 비엔날레-서울’전 때 기업 후원이 필요했다. 그때만 해도 대우가 무척 잘나갈 때였는데 전혀 후원해 주지 않았다. 후원금을 따러 어머니 지인 분이 하는 기업을 돌았다. ‘너희 집에서도 안 도와주는데 왜 우리한테 도와달라고 하느냐’고 하더라. 후원한 모 기업 사모님은 어머니와 관계가 안 좋은 분이었다. 그분이 내가 참여한 전시라는 걸 뒤늦게 알고 관장에게 ‘테이프 커팅 때 김선정 얼굴 안 보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개막 날 혼자 사무실에 앉아 펑펑 울었다.”
–본격적인 큐레이터 데뷔는 1995년 ‘싹’전 아닌가.
“어머니가 미술관을 지으려고 서울 소격동에 있던 한옥을 샀다. 아버지 첫 직장이자 장학금을 줬던 한성실업 창업주 김용순 회장의 한옥이었다. 미술관 개관 3년 전인 1995년 이 한옥에서 열린 프리뷰 전시가 ‘싹’이었다. 마침 광주비엔날레가 시작한 해였다. 비엔날레를 보러온 해외 미술계 인사 중 그 전시를 보고 간 사람이 많았다. 운 좋게 해외에 이름이 조금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불, 최정화, 서도호 등 1990년대 중반 함께한 작가가 국내 화단의 대표 주자가 됐다. 양혜규, 김성환 등 그 아래 세대 유명 작가도 당신이 기획한 전시로 해외에 알려진 경우가 많다. 예술 선구안이 좋은 건가.
“글쎄, 내 선구안보다는 그들이 유명해져 가고 있는 여정에서 나를 만난 것 아닐까. 나와 일한 모든 작가가 스타가 된 것도 아니다. 반짝 떴다가 지금은 어디서 뭐 하는지도 모르는 작가도 수두룩하다.”
–성공한 작가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다 까다롭다. 무지무지! 정말 치열하게 공부한다. 결국 열심히 한 작가가 남더라.”
–당신도 워커홀릭 아닌가.
“서로 경쟁하듯 바쁘게 사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자연스레 열심히 살게 됐다. 초등학교 때 피겨 선수였다. 시간 딱딱 맞춰 훈련해야 했다. 그때 몸에 밴 근면성실이 아직도 도움이 된다.”
김선정에게 성공한 미술 작가들에게서 발견한 공통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다들 무척 까다롭다는 것? 그것도 무지무지!” 그는 “결국 꾸준히, 열심히 한 작가가 살아남더라”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기억 잃은 아버지, 사업 자금 찾아
–지난 연말엔 아버지 1주기 기념집(’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이, 2월엔 어머니 회고록이 각각 출간됐던데.
“아버지 책은 막냇동생(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이, 어머니 책은 내가 출간을 맡았다.”
–계기가 있었나.
“몇 해 전 친한 재미교포 큐레이터 주은지씨가 북한에 갔는데 우리 아버지 흔적이 많더라고 했다.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기록을 남겨 보라고 조언하더라. 게을러 미루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재작년 돌아가셨다. 정말 후회했다. 그제야 어머니가 오랫동안 준비해 오시던 책 생각이 났다. 내가 팔을 걷어붙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땠나.
“사실 아버지와 대화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1년에 200일 넘게 해외 출장을 가셨다. 가족보다 직원이 우선이었다. 크리스마스, 설날엔 해외에서 외롭게 지내는 직원을 챙겨야 한다면서 해외 공장에서 보내셨다. 대신 어딜 가시든 저희 남매와 엄마 앞으로 각각 엽서를 보내주셨다. 다정한 분이었다.”
–김 회장이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장례를 조촐하게 치러 화제가 됐다.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 당부하셨다. 기계에 의존해 삶을 억지로 이어가며 자식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다고.”
–말년에 기억이 희미해지셨다는 건….
“마지막 1년 정도 치매를 앓으셨다. 어머니만 알아보셨다. 회사가 안 좋아지고 두 분이 많이 싸우셨다. 그런 아버지가 병상에선 어머니만 찾으셨다. 그때 알았다, 아버지가 엄마밖에 몰랐구나. 어머니도 그러셨다. ‘대우를 잃었지만, 가족을 얻었다’고. 아버지가 어머니 보고 ‘엄마, 돈 1000만원 줘, 2000만원 줘’ 하셨단다.”
–무슨 의미인가.
“아버지가 1967년 자본금 500만원에 직원 다섯명으로 대우실업을 만드셨다. 초반엔 자금난에 시달렸다. 어머니가 계를 꾸리며 자금을 끌어왔다. 어렸을 적 내 점심의 대부분은 곗날 엄마 따라 먹은 중국집 짜장면이었다(웃음). ‘돈 달라’는 아버지를 보며 어머니는 타들어가는 기억력에도 사업가 김우중을 놓지 못하신 것 같다고 했다.”
김우중 회장이 해외 출장지에서 딸에게 보낸 엽서. /김선정 제공
◇먼저 떠난 동생 이름 담은 미술관
–가족끼리 끈끈한가.
“아무래도 너무나 큰 시련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
김선정이 동생 이야기를 꺼냈다. 1990년 11월, 어머니가 보스턴에서 유학 중인 장남 선재, 차남 선협(아도니스 부회장)씨와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내고 싶다면서 미국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마중 나오지 마라 했지만 효자 아들들은 차를 몰고 공항으로 갔다. 시간이 빠듯해 지름길로 들어섰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트럭과 정면충돌했다. 선재씨는 그 길로 다시 눈을 뜨지 못했고, 선협씨는 극적으로 살았다.
–그날을 기억하는가.
“남편과 미시간에 살던 때다. 새벽에 병원에서 전화가 와 동생이 많이 다쳤다고 했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세 식구가 비행기를 탔다. 가보니 어머니는 혼절하셨고,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동생의 시신을 본 순간 빼고, 기억이 거의 안 난다. 너무 슬퍼 애써 기억에서 지운 건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죽어도 같이 있어야 한다며 방배동 집에 선재를 묻겠다고 하셨다. 그럴 수는 없어 우리 가족이 자주 가던 안산 농장에 시신을 묻었다. 어머니는 한동안 농장에서 살며 동생 곁을 떠나지 못했다.”
–대우그룹이 해체된 후 농장이 매각됐다고 들었다.
“원래 정부에서 안산 농장은 놔둔다고 했다는데 말이 바뀌어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농장이 매각되기 전, 동생 무덤을 처리해야 했다. 부모님이 들어오실 수 없는 상태였다. 어머니 친구 분 도움을 얻어 동생 관을 열고 시신을 화장했다. 사람들 눈을 피해 두 남동생과 팔당댐으로 갔다. 한 줌 재가 돼 버린 선재를 강물에 뿌렸다. 어느 초겨울 밤이었다.”
–동생 이름이 미술관으로 남았다.
“1991년 경주힐튼호텔을 개관할 때 미술관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동생 이름을 따 ‘선재미술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는 미국에 있어 참석을 못 했는데, 아버지가 선재 이름을 보며 눈물을 쏟아내셨다고 한다. 1998년 또 하나의 선재가 생겼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다. 어린 나이에 떠난 동생 생각을 하면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트선재 부관장으로 일하다 2004년 비영리 전시 기획 단체 ‘사무소’를 차려 독립 큐레이터로 일했다. 그즈음 6년 가까이 해외에서 유랑했던 부모님이 들어오셨다.
1990년대 김일성과 만난 김우중 회장과 정희자 여사. /김선정 제공
◇김일성에게서 온 돌 케이크
–어머니 자서전에 김일성 주석 만난 이야기가 나오더라.
“아버지가 1988년 처음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다음엔 김 주석이 가족을 데리고 오라고 해서 어머니가 따라갔다. 아버지는 일 얘기 끝나면 말이 없는데, 어머니는 워낙 호기심 많고 사교적이다. 어머니 눈엔 큰 주석궁에서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여든 노인 김일성이 안쓰러워 보였단다. ‘왜 혼자 사시느냐, 외롭지 않으냐’고 했더니 김 주석이 ‘나도 여기 살고 싶지 않은데 우리 아들이 여기 있으라네요’ 하더란다. 어머니가 김 주석 팔짱을 껴 북한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기도 했단다. 한번은 김 주석이 부모님을 또 초청했는데, 어머니가 첫 손주인 저희 큰애 돌이라 못 간 적이 있다. 아이 돌 날, 집으로 축하 케이크가 왔다. 김일성이 베이징을 통해 보낸 축하 케이크였다.”
김 회장은 대담집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대북 특사로 김일성·김정일과 20여 차례 만났다고 밝혔다.
–10년 가까이 비무장지대 마을에서 예술 작업을 하는 ‘리얼 DMZ 프로젝트’를 해오고 있다. 그런 경험이 영향을 미쳤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북 관계가 경색돼 있지만, 이런 때일수록 문화 교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평양 비엔날레’를 여는 게 꿈이다.”
–어머니 정희자 여사는 대단한 ‘여장부’로 알려졌다. 늘 흐트러짐 없는 복장과 화려한 화장을 하고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스타일이 어머니와 완전히 다르다. 반항심인가?
“허리 드러나는 옷은 질색이다. 아버지가 엄마한테 쟤 옷이 뭐냐며 옷 좀 사주라고 한 적도 있다. 반항도 많이 했다. 그런데 욕하면서 배운다지 않나. 어머니와 점점 닮아간다. 아직 어머니 기가 나보다 세지만(웃음). 책을 준비하며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세상을 뜨기 전 찍은 가족 사진. /김선정 제공
◇'김선정 아버지'에 행복했던 김우중
–어머니 자서전에 “김선정이 ‘김우중의 딸’ 아니라 김우중이 ‘김선정의 아버지’라고 불릴 인물이 돼 자랑스럽다”고 돼 있더라.
“아버지도 그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하셨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딸을 자랑스러워하셨다. 내가 기획한 전시에 와본 적이 거의 없는데 몇 해 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정보원 예술감독으로 있을 때 전시 보러 내려오시기도 했다.”
–김우중은 어떤 아버지였나..
“혼자 제가 열심히 한 것처럼 말하지만, 아버지의 큰 울타리가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성취들이다. 깊이 감사한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제겐 훌륭한 아버지였고, 훌륭한 기업가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의지가 아니라 시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 않았나 본다. 물론 무리해서 사업을 확장할 때 어머니를 비롯해 옆에서 한 경고를 듣지 않으셨던 것은 잘못이었다.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 제어가 안 되는 상황으로 몰리셨던 것 같다.”
–얼마 전 미래에셋대우증권이 ‘대우’를 떼면서 대우가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모든 게 영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버지의 말로가 억울하다는 생각도 하나.
“억울할 때도 있지만, 같은 일도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뭣보다 우리 가족은 죄송한 마음이 크다. 대우 사태로 직장을 잃은 많은 분, 감옥에 들어가시게 된 아버지 측근들께 어머니도 저도 마음의 빚이 많다. 그저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터뷰가 끝난 뒤 김선정은 오후 6시 서울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서둘러 역으로 갔다. 그와 함께 오후 3시 7분 광주송정역에서 용산행 KTX에 올랐다. 김선정은 용산역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 55분 동안 1초도 자리에 앉지 않고 복도에 서서 업무 전화를 했다. 김우중 회장 신간 회고집 속 흑백사진이 오버랩됐다. 김 회장이 해외 출장길, 녹초가 돼 어느 외국 공항 대합실에서 눈을 붙인 모습이었다. 딸의 시간이 사진 속 아버지의 시간과 닮아 있었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해외 출장길 공항 대합실 의자에서 곯아떨어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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