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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김창열 작품관

김창열(1929~ ) - 물방울 - oil on hemp cloth - 162.0☓116.3cm (100) - 1976년

by 주해 2022. 11. 23.

2020-03-03 19:00:26

 

 

“물방울이 연작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73, 74년경이 아닌가 본다. 연작이란 하나의주제의 맥락 속에 놓여있는 작품군群을 말한다. 따라서 물방울은 하나의 화면으로 독립되면서도 동시에 전체의 작품으로 연계되어 있다. 하나는 전체 속의 하나이고 전체는 하나하나의 집결이다. 물론, 하나하나의 화면은 개별로서의 다른 모습을 띤다. … 대부분의 경우 물방울은 영롱한 모습으로 스스로의 존재성을 각인시키지만 때로는 바닥에 스며드는, 물방울로서의 생명을 다한 흔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방울이 흘러내려 긴자국을 남기면서 아랫부분에 가서 가까스로 맺혀있는 경우도 있다. 이 작품들이 대부분 생지raw canvas 위에 구현됨으로써 바탕과 이미지의 이원적 구조가 부단히 무화되고 물방울이 바탕에서 생성되는 느낌을 주고 있음이 독특한 화면 인식으로 부각되고 있다.말하자면, 물방울은 인위적으로 그려졌다기보다 자연적으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오광수『김창열 화업 50주년』(갤러리현대, 2013), p.11.화면의 투명하고 생생한 물방울은 웅크리듯 끌어당기는 장력과 주르륵 흘러내리게 만드는 중력 사이를 버티며 화면 아랫부분에 맺혀있다. 바탕칠을 하지 않은 마포를 캔버스로 사용하면서 고유의거친 질감이 느껴지고 여백이 돋보이게 된다. 작품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마포의 물성은 물방울의영롱함과 대비된다.일찍이 한국전쟁을 통해 생사의 고비를 경험한 김창열은 자연스럽게 앵포르멜Informel 운동에 심취했다. 이 시기 김창열의 작품은 앵포르멜 작가 대부분이 그랬듯 굵은 선이나 점, 또는 할퀸 듯한자국을 낸 추상 작품이었다. 1960년대부터는 국제 화단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에서 수학하면서 해외 미술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시기 뉴욕은 팝아트가 주류를 이루며 미니멀아트, 개념미술, 하이퍼 리얼리즘 등 다양한 사조가 유행했다. 참혹한 전쟁을경험한 후 이국에서 대중문화와 소비사회, 다양한 예술 사조의 반목과 창조의 흐름을 목격한 그는 당시 미술계 흐름을 쫓기보다 대상의 재현에 대한 회화의 본질을 고민하며 독창적인 방향을찾기 시작한다.

이때는 캔버스에 점철된 전쟁의 상처와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 점차 공이나 구체球體로 변화해가면서 기하학적 이미지로 발전하게 되는데, 공간의 분할과 형체의 단순화, 도상과표현의 효과를 고민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1969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김창열은 1970년에 제작한 〈제전〉과 같이 구체에서 점차 흘러내리는 점액질의 형태로 대상을 변화해갔다. 마침내 1972년 《살롱 드메Salon de Mai》전시에서 〈밤의 행사Event of Night〉를 선보였고, 이후 평생을 고집스럽게 물방울을 반복하여 그렸다. 그의 화업에서 물방울이 탄생하게 된 것은 1971년 파리 근교 팔레조Palaiseau의 화실 뒤편에서 아침 세수를 하다 우연히 캔버스에 흘린 몇 개의 물방울을 보고 전율을 느낀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자신의 회화에물방울을 하나하나 생생하게 옮기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실제로 착각하게 하는 환영을 만들어냈다. 본격적으로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김창열은 캔버스를 비롯해 목판, 헝겊, 나뭇잎, 모래 등 다양한 재질의 바탕에 물방울을 그렸다. 전기작업은 이후 작업에 비해 물방울만이 순수하게 자리하고 있어 다채로운 표면의 특성이 있는 그대로 화면 전반에 드러나는데, 마포의 거친 물성은 물방울의 영롱함과 대비되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가상의 빛과 그림자로 형성된 물방울을보면 하나의 붓 자국이자 이미지에 불과하나 적당히 거리를 두고 보면 투명한 물방울이 되어 부재와 존재의 공존을 동시에 드러낸다.이후 김창열은 1980년대부터 캔버스의 배경에 인쇄체로 쓴 한자로 공간을 그려 넣기 시작하면서작품의 조형적 실험과 변화의 폭을 확장시켰다. 활자의 등장은 신문지에 물방울을 그리던 것에서 시작했다. 신문지에 인쇄된 활자의 획이 주는 단단함과 날카로움은 물방울의 부드러운 질감과충돌하며 시각적 환영의 효과가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작가는 문자와 물방울을 대등하게 배치하는 과정에서 한자뿐만 아니라 한글, 영문, 숫자 위에도 물방울을 그리는 시도로 수행했으며, 그가운데 서예를 배웠던 유년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한자 배치에 정착한다.

이러한 작업을 ‘회귀回歸, Recurrence’로 명명한 것에 대해 김창열은 자신을 성장시킨 문화권으로의 회귀, 더 나아가 태어난 곳이자 돌아가게 될 흙으로의 회귀를 뜻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한자가 드러내는 동양적 정서와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자기 근원으로의 회귀’로 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