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 고송유수관 이인문(金弘道, 李寅文) : 송석원시사야연도 松石園詩社夜宴圖, 송석원시회도 松石園詩會圖 : ink and color on paper : 31.8☓25.5cm (each) : 1791
by 주해2022. 12. 13.
2021-10-15 21:00:46
송석원시사 멤버 9명이 벌인 시회도의 하나로 달밤의 모임을 더없이 그윽하게 잡아냈다.
필치로 보아 이 모임으로 부터 5~6년쯤 뒤인 단원 50대 중반 그림인 듯 하다.
송석원시사 멤버 9명이 한낮에 벌인 시회도 그림으로 인왕산 자락에 비껴 보이는 북악의 모습에서 실경을 더욱 감지하게 된다. 이인문의 그림은 항시 이처럼 넓게 펼쳐지는 시원스런 구도를 취하고 있다.
LITERATURE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국립중앙박물관, 2016), pp.144-145, pl.58-59.유홍준, 화인열전 2(역사비평사, 2001), p.256, pl.35.
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일지사, 1999), p.128, pl.12.
韓國의 美 21 檀園 金弘道(中央日報社, 1979), pl.70, 71.
작품설명
단원 김홍도 金弘道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庚炎之夜雲月
朦朧 筆端造化
驚人昏夢
眉山翁
달빛 밝은 밤,
구름 속의 달 몽롱한 가운데 빼어나고
붓끝의 조화 속에 해오라기와 사람들이
꿈 속에 잠겨 있다.
미산옹.
고송유수관 이인문李寅文송석원시회도松石園詩會圖
古松流水館道人李寅文 文郁 寫於檀園所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문욱이인문의 자이단원 김홍도 집에서 그렸다.
謙玄以後 不見山水善畫者矣 今覽此帖 即松水館 亦是名不虛傳望八眉翁
겸재謙齋와 현재玄齋 이후에 산수화를 잘그리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이첩을 보니 송수관松水館 역시 그 이름이 헛되어 전해진 것이 아니구나.80세를 바라보는 미산眉山이란 늙은이가쓰다.
1791년 6월 15일, 서울 인왕산 아래 천수경千壽慶의 집인 송석원松石園에서는 유두절流頭節을 맞아 송석원시사 동인들의 아회가 열렸다. 송석원시사는 익히 알려진 대로 중인 출신의 내로라 하는 문인들이 모인 문학동인이었다. 송석원에서 주로 모여 송석원 시사라 불렀으며, 송석원은 옥인동 계곡에 있었기 때문에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도 했다.
1791년 유두절의 모임에는 장혼張混, 차좌일車佐一, 조수삼趙秀三, 박윤묵朴允默 등 핵심 멤버들이모여 밤늦도록 시회를 가졌는데, 이때 단원과 동갑내기 화원인 이인문은 낮에 인왕산 계곡바위에 모인 장면을 그렸고, 단원은 한밤중 집 마당에 둘러앉은 장면을 그렸다.
이 두 그림은 그림 자체도 명화이지만 당시 최고 가는 화가의 그림을 같은 주제로 해서 한자리에 만나게 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특히 두 화가는 화풍이 대조적인 것으로유명하다.
이인문은 구도를 잡을 때 항시 시야를 넓게 펼치는 반면, 단원은 대상을 압축하여 부상시키는 특징이 있다. 이인문은 화면 전체를 그림으로 꽉 채우지만 단원은 주변을 대담하게 생략한, 그래서 똑같은 풍경을 그려도 이인문의 산수가 평수에서 훨씬 넓어 보인다. 두 그림에서도 두 대가의 그런 특징이 역력하다. 나는 두 화가의 작품을 볼 때면 항시 나도 모르게 이인문의 그림은 점점 멀리 떨어져서 보게 되고, 단원의 그림은 점점 다가가서 보게 되는 것을 느낀다. 이 두 그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날 송석원시사 멤버들이 쓴 시는 김의현金義鉉이 모으고, 거기에 장혼의 서문과 천수경의발문을 받아 첩으로 만들면서 이 두 그림을 앞에 붙였다. 그것이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이다.그리고 6년 뒤인 1797년에 마성린이 후기를 쓴 것이 첨부되어 있는데, 어느 글을 봐도 이모임이 있던 그 현장에 단원과 이인문이 초대되었다는 글은 없다. 게다가 이인문의 그림 상단에는 “단원의 집에서 그리다寫於檀園所”라고 씌어 있어 나중에 김의현의 부탁으로 두 화가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단원의 나이 47세에서 53세사이로 추정된다. 정황으로 보면 유두절 모임 당시에서 멀지 않은 시점이라 생각되지만, 화풍으로 보면 50대에 가깝다.
유 홍 준
조선 후기 여항 문학의 중심,송석원시사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한시 모임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며 중인들의 문화로 점차 그 저변이 확장되었다. 그 중 1786년 결성된 송석원시사는 1820년경까지 약 30여년정도 모임을 이어나가며 여항 문단의 중추가 되었다.처음 시사를 결성한 13명의 동인들은 1750-70년대 인왕산 근방에서 함께 자란 인물들로 몇 사람들은 서당에서함께 글공부를 했던 사이였다. 대체로 하급 공무원이거나 서당 훈장의 중인 신분이었으나 양반 못지 않은 문화적소양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예전부터 정기적인 모임을 가져온 이들은 1786년 음력 7월 16일 인왕산 기슭 청풍정사에서 본격적으로 시사를 결성하기로 하고 범례 22조항을 만들어 시사의 뜻을 밝혔다.송석원시사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점차 시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시사를 크게 여는 날이면 수백 명이 모이기도 했다고 전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는 무기 대신 종잇장으로 싸운다는 뜻의 백전白戰이라는 백일장을 열었으며, 그 중 으뜸으로 뽑힌 글은 장안에 돌아다니며 사람들 입으로 전송되었다고 한다. 순라꾼들도 한밤중에 돌아다니던 사람을 붙잡았다가도 ‘백전에 간다’고 하면 놓아주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송석원시사를 중심으로 한 문학 열풍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이들의 활동은 《옥계사십이승첩》과 이번 출품작이 실려 있었던 《옥계청유첩》, 그리고 《옥계십경첩》을 통해 알 수있다. 《옥계사십이승첩》은 처음 송석원시사가 결성되며 제작된 시화첩으로 임득명의 그림 4점이 함께 실렸다. 《옥계청유첩》은 김의현의 집에서 열린 시사를 기념해 제작한 것이며 앞서 언급한대로 단원 김홍도와 고송유수관 이인문의 그림이 실려 있었다. 당대 최고의 도화서 화원 두 명의 그림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송석원시사의 위치를 다시금 확인케 하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옥계십경첩》은 《옥계청유첩》과 같은 해 겨울에 만들었으며, 《옥계사십이승첩》과 거의 동일한 구성으로 역시 임득명의 그림이 실렸다.송석원시사는 1818년 천수경이 세상을 떠나고 동인들이 나이가 들면서 활동이 뜸해졌다. 몇 동인들은 뒤를 이어 19세기 중반까지 새로운 시사를 결성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1817년에는 추사 김정희가 시회장소 뒤편의 바위에 ‘송석원’이라는 각자를 새겼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그 바위의 위치가 미상이다. 천수경이 살던송석원은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윤덕영이 사들이며 벽수산장이라는 저택을 지어 시회의 흔적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지금은 송석원이 있던 일대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단원과 고송유수관의그림을 통해 시회의 모습과 열띤 동인들의 모습이 생생히 남아 그 역사를 되짚어보게 한다.
참고도판임득명, 옥계사십이승첩, 1786, 삼성출판박물관 소장송석원시사 각자, 1959년 김영상 촬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