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일본은 의대 증원을 어떻게 다뤘을까
영국 의료진이 지난달 정부가 10년 차 이하 주니어 의사들의 임금을 삭감한 것에 항의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런던 세인트토머스 병원 앞에서 파업 시위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의대 증원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의대 정원 증원은 다른 나라도 이미 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난리가 난 경우는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길래 갈등이 덜했나? 최근 의대 정원을 늘린 일본과 이제 늘리려 하는 영국을 살펴보자.
일본의 의대 정원은 크게 네 변곡점을 거쳤다. 1973년 전국 모든 광역 지방 단위에 의대를 설치하겠다는 내각 결정이 나왔고, 이에 따라 의대 정원 증가가 있었다. 그러나 공급 과잉 우려가 제기되면서 1982년 의대 정원을 감축하기로 하여 2000년대 초반까지 점진적으로 의대 정원은 줄었다. 그러다 2006년 고령화 사회의 의료 수요 증가, 지방 의료 공급 부족 등이 제기되면서 다시 늘리기로 하여 2008년부터 의대 정원은 다시 늘어났다.
그 후 2018년 후생노동성 산하 ‘의료 종사자 수급 관련 검토회’의 의사수급분과회에서 2028년 내지 2033년에는 의료 서비스 공급 초과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치를 제시하였고, 이를 일본 정부가 수용하여 2019년 수치(9420명)를 상한으로 의대 정원을 제한하기로 했다. 실제로 2023년도 일본 의대 정원은 9384명으로 2019년 대비 36명(약 0.4%) 감소했다.
영국 국민건강보험공단(National Health Service)은 작년 6월 장기 인력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의대 정원 문제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현재 대략 9500명 수준인 의대 정원을 단계적으로 2031년까지 약 1만5000명으로 늘리려 하고 있다. 이 계획의 초년도인 2024학년도에는 의대 정원을 205명 증원하기로 했다.
의대정원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이 이어지고 있는 13일 오전 대전의 한 병원에서 의료진이 진료를 보고 있다. 이날부터 군의관 및 공중보건의가 20개 의료기관에서 정식 업무에 들어갔다. /신현종 기자
일본과 영국 모두 의대 정원 조정 과정에서 의사들의 대규모 사직이나 정부의 형사처벌 공언 등 험악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정원 결정 과정에서 의사들 목소리를 반영해 줬다. 현재 일본 의대 정원 결정은 공식적으로는 내각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후생노동성 산하 의사수급분과회에서 논의하고, 그 결과를 내각이 추인하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 분과회 참가자는 총 20명인데, 그중 14명이 의사다. 이들은 임상이나 의료행정 경험이 풍부한 명망가이며, 그중에는 우리나라 의협에 해당하는 일본의사회 등 다양한 의사 단체 대표들도 포함되어 있다. 의사 단체들은 분과회를 통해 정부와 협의하고, 자기들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시킨다.
영국의 의대 정원 증원 요구는 의사들에게서 나왔다. 의사가 의사를 늘리자고 하는 일을 우리는 신기하게 느낄 수도 있는데, 의사가 사실상 정부에 고용된 공무원인 영국에서 의사 증원은 의사들의 숙원 사항이었다.
당초 영국 정부는 예산 제약을 이유로 증원에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2018년 영국 왕립의사회(Royal College of Physicians)가 의대 정원을 1만5000명으로 늘릴 것을 요구했고, 2021년에는 영국 의대협의회(Medical Schools Council)도 보고서를 내고 의대 정원 증원 및 의대 17곳 신설을 요구했다. 여기에 2022년 하원 보건복지위가 가세했고, 야당인 노동당도 의사 단체들의 요구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결국 2023년 영국 정부는 의대 정원 증원을 포함한 종합적 의료 인력 확충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영국 정부가 발표한 계획을 보면, 당초 왕립의사회, 의대협의회가 요청했던 내용이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정부가 의사들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일본 도쿄에서 한 여자 어린이가 할아버지·할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20여년 지속된 저출산의 영향으로 산부인과와 소아과 병원이 급감하고 있다. 초등학생 수가 줄면서 통폐합한 학교도 많다. ‘출산난민’ ‘교육난민’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둘째 이유는 점진성이다. 일본 정부가 2008년 의대 정원 증원을 결정한 그해 의대 정원은 7625명에서 7793명으로 168명(2.2%) 늘었다. 이듬해는 693명(8.9%) 늘렸는데, 이것이 지난 40년을 통틀어 가장 커다란 의대 정원 증가 폭이다. 그 후로는 매년 주로 1% 내외 증원하여 10년간 의대 정원은 총 1795명(23.5%) 증가했다. 영국은 야심 찬 의대 정원 증원 계획을 내놓긴 했지만, 초년도 증가 폭은 205명(2.2%)에 불과하다. 정원 증원이 이렇게 점진적인 데는 이유가 있다. 늘어난 의대 정원을 가르칠 교육 역량을 확보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구체적 예산 계획을 들 수 있다. 일본, 영국 모두 단지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는 구호만 내세우지 않았다. 단계적으로 예산이 얼마나 들며, 어떻게 댈 것인지를 국민과 의사들에게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려 했다. 의사 교육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의대 졸업 후에도 전문의 양성 과정에서 교수 인력, 실습 공간, 기자재, 임상 사례 확보 등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이런 비용을 어떻게 댈지 모른다면 현장의 교수진으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구체적인 예산 계획을 내놓는다면 당연히 의사들의 지지 확보는 더 쉬울 것이다.
의대 정원 증원을 원만히 처리할 수 없나? 일본과 영국의 경험은 해답을 시사한다. 첫째, 의사들을 정책 결정에 참여시키고, 합리적인 의견이 있다면 수용하라. 둘째, 증원하되 점진적으로 하라. 셋째, 구체적인 예산 조달 계획을 제시하라. 극한 대립 중인 의사와 정부 모두 다른 나라의 경험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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