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후 일본인 71만명, 단돈 1000엔씩 들고 조선을 떠났다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 공공기관, 단체, 회사, 개인 등이 소유한 일체의 재산은 1945년 9월 25일부로 미군정청이 접수하고 그 소유권을 행사한다.”(미군정 법령 제33호, 제2조. 1945.12.6.)
해방 당시 한국은 ‘세계 최빈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본 축적 면에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2위에 해당하는 상대적으로 산업화된 지역이었다. 1930년대 이후 공업화 정책에 따라, 한반도의 산업 구조는 광공업 비율이 53%, 제조업 중 중화학공업 비율이 51.3%에 달했다. 다만, 그중 80%가 일본 정부와 일본인 소유였기 때문에 산업화의 과실이 한국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해방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인이 소유한 한국의 국부(國富) 총액은 52억달러로, 중화학공업 투자가 집중되었던 북한이 29억달러(55.8%), 남한이 23억 달러(44.2%)였다.
진주한 지 넉 달이 지난 1945년 12월, 미군정은 해방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인 소유의 재산 일체를 몰수해 미군정에 귀속시켰다. 이를 일컫는 공식 용어는 ‘귀속재산’이었지만, 한국인들은 적국의 재산이라는 의미에서 ‘적산(敵産)’이라는 용어를 더 자주 사용했다. 귀속재산 중 정부 소유의 국공유 재산은 19%에 불과했고, 법인 소유의 기업체 재산(67.6%), 개인 소유의 재산(13.4%) 등 사유 재산이 전체의 81%를 차지했다.
조선에 거주하던 71만여 일본인은 패전 이후 예금, 유가증권, 부동산은 물론 가재도구까지 미군에 몰수당하고, 말 그대로 빈손으로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귀국길에 민간인이 소지할 수 있는 현금은 1000엔에 불과했고, 군인은 그보다 적었다. 일본인의 귀국이 본격화된 12월에야 일본인 사유재산의 귀속이 결정되는 바람에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창고에 보관 중이던 서울 2만3000여 개, 부산 2만2000여 개의 탁송 화물이 일본으로 송출되지 못하고 미군정 소유로 몰수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미군정이 일본인의 사유재산까지 몰수한 것은 1907년 개정된 ‘헤이그 육전(陸戰) 조약’ 제46조 “어떠한 경우에도 점령군은 적지의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손댈 수 없다”는 소위 ‘사유재산 불가침 조항’ 위반이었다. 억측은 구구하지만 ‘자본주의 진영의 수호자’ 미국이 무리하게 패전국 일본 국민의 사유 재산까지 귀속시킨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에 참석한 존 하지(왼쪽부터)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과 더글러스 맥아더 일본 점령군 사령관, 이승만 대통령.
1951년 9월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일본은 태평양전쟁 전후 처리 종식을 위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귀속재산의 국제법상 적법성 논란을 의식한 이승만 정부의 요구로 조약의 ‘제4조 b’에는 “일본은 한국 내의 미군정이 실행한 귀속재산 접수, 처리 등에 따른 모든 행정 조치의 적법성을 인정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미군정은 관리가 어려워 민간에 불하(拂下)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귀속재산을 3년 동안 관리하다가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했다. 미군정이 불하한 대표적인 귀속재산은 민간 주택 8만2000여 채, 100만엔 이하의 소규모 사업체 500여 개사, 남한 농경지의 13.4%에 달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농경지 32만여 정보 등이었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주택(적산 가옥) 불하는 무주택 서민에게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기회를 제공했고, 전재민(戰災民), 월남민으로 극심해진 대도시 주택난 해소에도 도움을 주었다. 미군정은 신한공사(New Korea Company)로 이관해 관리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농경지를 소작민 60여 만 가구에 불하했다. 토지 가격은 연평균 생산량의 300%, 20%씩 15년간 분납하는 조건이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고 선전하면서 경작권만 인정한 채 25% 이상의 현물세를 징수한 북한의 토지개혁보다 오히려 나은 조건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된 귀속재산은 건수로 29만여 건이었고, 그중 기업체는 2200여 건이었다. 귀속재산 규모는 3000억원 정도로 추정되는데, 1948년 국가 예산 351억원의 8배 이상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귀속재산 불하는 농지개혁과 보조를 맞춰 1950년부터 본격화되었다. 농지개혁 당시 정부는 지주에 대해 토지 가격에 상응하는 지가증권을 발급하고 나중에 귀속 사업체를 불하받을 때 그것으로 매수 대금을 납부할 수 있게 했다. 지주를 산업자본가로 전환하기 위해 의도된 정책이었지만, 90.8%에 달하던 100석 이하의 군소 지주들이 발급받은 지가증권으로 대부분 중견기업 이상이었던 귀속 사업체를 불하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지가증권이 귀속재산 불하 대금으로 수납된 규모는 41.7%에 달했지만,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지주에게서 지가증권을 헐값에 구입한 브로커에 의한 수납이 대부분이었다.
관리인, 임차인에게 최우선권이 부여된 귀속 사업체 불하 과정에서 정실 불하, 정경 유착, 부정 축재 등 비리가 속출했다. 또한 6·25전쟁, 기술과 자본 부족, 관리인의 무능 탓에 귀속 사업체의 경영도 대체로 부실했다. 하지만 선경직물을 불하받아 SK그룹으로 키운 최종건, 쇼와기린맥주를 불하받아 OB맥주, 두산그룹으로 키운 박두병, 조선화약공판을 불하받아 한화그룹으로 키운 김종희, 한국특수제강을 불하받아 동국제강으로 키운 장경호 등 몇몇 유능한 관리인은 귀속 사업체를 불하받아 ‘한강의 기적’을 주도할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귀속재산은 1951년부터 15년 동안 이어진 한일청구권 협상의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 한국이 일본에 대해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적 성격의 청구권을 제기하자, 일본은 패전 이후 한국에 두고 온 재산 특히 민간의 사유재산에 대한 역청구권을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미군정의 일본인 재산 귀속의 합법성을 인정했지만, 헤이그 육전 조약에 따라 한국 정부는 일본인 귀속재산을 보상해야 한다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상대방에게 청구권을 주장하려면 정확한 금액을 제시해야 하는데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 그 정확한 금액을 산정하지 못했다. 결국 양측은 상대방에 대한 청구권 주장을 포기하는 것으로 상쇄하자는 데 합의했다. 그 대신 일본은 한국에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자금을 제공했다. 한국 정부는 그 자금이 “한국인들이 35년간 일본 식민지 지배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경제 수탈에 대한 보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식민 지배에 따른 대일청구권은 일본의 귀속재산 청구권으로 상쇄되었으며, 그 자금은 ‘경제협력자금’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미군정은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해 대한민국 정부에 넘겨주었다. 그 덕분에 한국은 일본이 35년 동안 한반도에 쌓아놓은 부를 고스란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귀속재산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끈 마중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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