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인사이트]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계단의 미학’… 삶의 기쁨과 고통을 표현
계단 위에 신전 지은 까닭은 수고를 통해 몸과 마음 준비시키는 것
영화 ‘트루먼 쇼’ 주인공, 거짓 깨닫고 바깥 세상 통하는 계단 올라
뮌헨에 있는 ‘끝없는 계단’은 새옹지마 같은 인생의 리듬 나타내
요즘에는 크고 멋진 계단 보기가 드물다. 지하철이나 작은 건물에서는 여전히 계단이 유효하지만, 시내의 번듯한 건물에서 계단은 엘리베이터에 제 역할을 내주고 비상구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간혹 고급 호텔이나 대형 음악당 등에 가서 만나게 되는 계단은 확실히 공간을 역동적으로 만들어줄 뿐 아니라 공간의 여유마저 느끼게 하니 이제 계단은 럭셔리의 상징이 된 셈이다.
계단은 현대 미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 역할을 해왔다. 뉴욕 허드슨 야드에 조성된 토머스 헤더윅의 베슬(왼쪽)은 가운데가 비어 있고 가장자리는 계단으로 연결된 전망대이자 예술 작품이다. 현대미술의 초석을 다진 마르셀 뒤샹은 스물다섯 살에 그린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가운데)를 자신의 예술 행로에 큰 영향을 미친 대표작으로 꼽았다. 제임스 터렐의 대표작 로덴 크레이터(오른쪽)에서도 계단은 작가의 세계관이 응축된 중요한 도구로 활용됐다. /허드슨 야드 홈페이지·필라델피아 미술관·제임스 터렐 페이스북
하지만 계단에 대한 예술가의 관심은 아직 대체되지 않은 듯하다.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제임스 터렐이다. 그의 작품에는 계단을 올라가야만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 많다. 계단 높이만큼의 공간이 없어도 작품의 효과를 표현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일부러 몇 계단을 오르게 만드는 것은 그 수고로운 과정을 통해 몸과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이리라. 그리스 신전처럼 만들어진 수많은 미술관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바닥이 현실의 세계라면 높은 계단 위에 지은 신전 혹은 미술관은 정신적, 예술적 영역이다.
터렐의 작품에서 계단을 올라 만나는 세계는 대개 하늘이다. 탁 트인 하늘, 혹은 오묘하게 변화하는 빛의 세계, 늘 보던 아니 사실 하늘을 볼 틈조차 없이 살아오던 일상과는 다른 하늘이 거기에 있다. 무어라고 형언할 수는 없지만 거의 종교적 체험과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작가는 18세부터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따서 하늘을 누비며 지구를 내려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본다면 아웅다웅 심각했던 문제들도 작게 보이는 대범함, 혹은 보지 못했던 주변을 보게 되는 지혜로움에 한발 다가서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전달하는 방편으로는 예술이 제격이었으리라.
터렐의 계단은 영화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과도 무척 닮았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모두 거짓이었고 그 속에서 자신이 사람들의 구경거리였음을 깨달은 트루먼은 용기를 내어 세계의 가장자리에 다다른다. 바깥 세계와 연결되는 문은 높은 계단 위에 있다. 터렐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이 꼭 계단 위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굳이 계단을 넣은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가려면, 스스로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자 했기 때문이리라. 나가지 말라고, 나가면 안 된다고 만류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내딛는 트루먼의 모습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는 천사들의 이미지도 떠오른다. 영국 서남부 배스(Bath) 성당에 있는 천사들처럼 말이다.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질 뻔한 위험을 무릅쓰고, 게다가 편히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있지만, 천사들은 계단에 딱 달라붙어 마치 암벽 등반이라도 하듯 필사적으로 신을 향해 오르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렇다면 계단에서 내려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연 ‘하강’이다. 마르셀 뒤샹은 ‘샘’(1917)을 통해 현대미술의 시작을 열었다고 평가받지만, 그로 인해 미술이 너무 어려워졌다는 비평도 있다. 이 중에는 심지어 예술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예술이란 자고로 줄거리와 형상이 있는 그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1960년대 유럽의 몇몇 예술가는 78세의 뒤샹에게 죄를 묻기로 한다. 방법은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약 10m에 달하는 패널 8개로 이루어진 작품에서, 첫 두 이미지에는 25세에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나부’를 그린 후 홀연히 계단을 올라 다른 세계로 떠나버린 뒤샹이 등장한다.
실제로 그는 이 작품 때문에 친형 둘을 포함한 선배 작가들에게 비난을 받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대신 체스를 즐기며 마치 작가로서의 삶을 중단한 듯한 제스처를 취했었다. 젊은 예술가들은 그를 찾아가서 왜 ‘샘’ 혹은 ‘큰 유리’ 같은 작품을 만들었는지를 따지며 심지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발가벗겨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린다. 마지막 패널, 이렇게 사망한 뒤샹의 관을 사람들이 운반하고 있는데, 관 위에는 작가의 고국 프랑스가 아니라 그가 거의 일생을 보낸 미국 국기가 덮여있다. 이 또한 유럽의 회화 전통을 전복시킨 뒤샹에 대한 조롱의 표현이다.
이 그림은 가상이었지만, 실제로 계단과 죽음이 연결된 작품도 있다. 바로 2019년 뉴욕시에 세워졌던 토머스 헤더윅의 ‘베슬’이다. 높이 약 46m의 거대한 벌집 모양 구조물은 중앙은 비어있고 가장자리가 모두 연결된 계단으로 전망대이자 거대한 조각 작품과도 같다. 인도의 전통 계단식 우물에서 영감받아 제작하였다는 이 작품은 그야말로 공학과 미학이 어우러진 걸작임에 분명하건만, 안타깝게도 이 곳에서 네 명이나 연달아 자살을 하는 바람에 현재는 폐쇄되었다.
그런데 계단에 몸을 던진 사람이 다시 일어서는 기적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요한 부르주아라는 안무가의 작품으로 지난 연말 마곡에 새로 문을 연 LG아트센터에서도 공개된 바 있다. 계단에서 떨어진 사람이 다시 튕겨져 올라가는 비결은 바닥에 깔린 탄성 좋은 트램펄린 덕분이다. 현대무용과 서커스, 거기에 마술까지 결합된 듯한 공연은 알고 봐도 신기하다. 이 작품이 단지 공연장에서만 끝나지 않고 녹화 영상이 SNS를 타고 사람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건, 지금 이 시대가 그만큼 회복과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뮌헨에 설치된 공공 미술 작품,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끝없는 계단’에는 마치 오르는가 하면 어느새 내려가고, 내려가는가 하면 어느덧 올라가게 되는 끝없이 연결된 계단이 등장한다. 계단을 매개체로 오를 때의 고통과 성취, 내려갈 때의 상실감, 이를 극복할 때의 기쁨을 고루 표현한 여러 예술 작품은 인생사 새옹지마처럼, 오르면 내려야 하고, 내려가면 또 올라갈 수 있는 리듬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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