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의 난로
폴 세잔, 작업실의 난로, 1865년경, 캔버스에 유채, 41.30㎝,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틀림없이 난로를 그린 그림인데도 냉기가 감돈다. 초라한 작업실 거친 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인 무쇠 난로에 그나마 타오르는 불꽃이 곧 꺼질 듯 작아서 그렇다. 난로 뒤에 세워둔 캔버스 틀과 벽에 건 팔레트를 빼고는 그럴듯한 살림살이 하나 없이 테이블 위에 꽃 한 송이만 꽂아 뒀다. 추위에 꽃마저 창백하고 애처롭지만, 그림은 견고하고 묵직하니 흔들림이 없다.
남프랑스의 소도시 엑상프로방스의 은행가 집안에서 자라난 폴 세잔(Paul Cézanne·1839~1906)은 화가가 되기 위해 안락한 삶을 저버린 채 예술의 중심지 파리로 떠났다. 정작 세잔의 눈에 비친 파리는 ‘시커멓고 진흙투성이에 연기 자욱한’ 곳이었다. 대책 없이 따뜻한 고향을 떠나 변변치 못한 화가로 살면서 졸지에 춥고 배고픈 처지가 됐으니 그의 눈에 어딘들 곱게 보였겠는가. 그야말로 시커멓고 진흙투성이에 연기 자욱한 이 그림은 그의 신산한 삶을 보여준다.
가업을 이으라는 엄격한 아버지의 뜻에 억눌려 지내던 세잔을 파리로 끌어낸 건 죽마지우 에밀 졸라와 부단히 주고받은 편지였다. 졸라는 엑상프로방스에서 세잔과 함께 예술가의 꿈을 꾸다 가난에 내쫓기듯 파리로 떠나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작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세잔보다 빠르게 성공가도를 달렸다. 고향에서 가난하고 병약한 졸라를 부잣집 아들 세잔이 지켜줬다면, 파리에서는 유망한 작가 졸라가 시골에서 온 고집 센 화가 세잔을 지켜줬다. 이 그림의 첫 번째 주인이 바로 졸라였다. 그와의 우정이 아마도 어두운 화면 가운데 눈에 띄게 붉은 난로의 작은 불꽃 같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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