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0 20:05:41
LITERATURE
『이중섭李仲燮 근대한국미술선近代韓國美術選 1 』 ( 한국근대미술연구소韓國近代美術研究所 , 1976), pl.16.
『이중섭 드로잉 : 그리움의 편린들』(삼성미술관 , 2005 ) , pl.165.
『 LEE JUNG SEOB 1916 - 1956 이중섭, 백년의 신화』(국립현대미술관 , 2016 ) , p.58, pl.31.
『이중섭 , 백년의 신화』 ( 마로니에북스 , 2016 ) , pl.16.
EXHIBITED
삼성미술관 리움(서울) , 《이중섭드로잉 그리움의 편린들》 : 2005.5.19 - 8.28
작품설명
두 아이의 장난질에 곤욕을 당하는 아비, 있는 힘껏 머리채를 휘어잡고 목을 조르는 아이. 배 위로 올라타 주먹질을 해대는 아이. 저고리가 벗겨지고 발바닥이 보이도록 벌렁 자빠졌어도 두 살붙이가 품에 안겨 용쓰는 모습에 행복한 사내. 한 손에 물고기 줄을 쥐고 다른 손은 아들에게 제압된 사내는 짓눌리고 쥐어뜯기는 고통에 신음과 껄껄대는 웃음을 토해낸다. 벌거벗은 두 아이는 자기보다 큰 아비를 이기려고 죽을 둥 살 둥 인데 아비는 상대할 의지 없이 마냥 행복하고, 영문 모를물고기만 아이 발가락에 걸려 대롱거린다.액자형 구도에 인물들을 밀집시키고 방사형으로 뻗은 신체를 조형적으로 전개한 통영시기 작품으로, 아이들만 들여놓은 것이 아니라 아비로 보이는 사내와 아이들이 뒤엉킨 모습이다. 작가는 아비노릇 못해준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과 가족을 떠나보낸 자책감을 본인과 두 아들을 투영해 그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흰 옷의 상투머리 사내는 아들들과 뒤엉켜 행복에 취하지만 그림을 그리는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화면 밖 자신은 무척이나 밉고 쓸쓸했겠지 싶다. 차라리 얻어맞고 쥐어뜯기는 사내의 모습이 아이들을 향한 속죄의 의미였을지 모른다.1953년 7월, 이중섭은 구상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처자식을 만나고 온 후, 짧은 만남이 이전보다더한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다가왔지만 덕분에 가족을 다시 만나야한다는, 만날 수 있다는 목적과희망을 가지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이 시기 주변의 도움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 속에 작업에 전념할 수 있었고 1953년부터 54년 통영에서 상경하기까지 1년 이상의 시간동안 의욕적으로 작업에매진하게 된다. 양성소 강사로 출강하며 부인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술도 마시지 않은 채 제작욕이 왕창 솟아 작품이 산더미처럼 쌓인다.’고 자랑했을 만큼 이 때는 창작욕구가 절정에 이른 상태였다. 1955년 초에 예정된 전시를 성공적으로 치르고자 함이었지만 종국에는 금전적 보상을 통해 사랑하는 처자식과 만나기 위함이었다.
스스로의 죄책감과 절망감을 가족을 향한 희망으로 짓누르며 혼을 태우던 시기, 출품작을 포함해 <부부>, <황소>, <벚꽃 위의 새>, <소와 아동> 등 가족과자신으로 점철된 처절하고도 역동적인 역작이 등장한 때이기도 하다.1955년, 이중섭에게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던 1월 미도파화랑전시와 4월 대구전시는 평단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이때에 지인들은 이중섭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전한다. 불안과 절망의 끝에서 한 줄기 빛마저 차단되자 다시는 가족을 만날 수 없으리란 좌절이그를 잠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심해지는 생활고는 그의 몸과 정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고 지인들의 돌봄 속에 병원을 오가다 1년 후 결국 홀로 남은 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그의 곁에는 한 줄기 희망을 태워가며 그려낸 작품만이 남아있었다.
1954년, 이중섭의 이름을 후대에 알린 많은 역작이 탄생했지만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허공의 신기루처럼 이중섭을 점차 절벽 끝으로 내몰던 시기였다.“… 당신과 아이들이 정말 보고 싶소. 당신과 아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 보고 싶다, 보고싶다를 반복하기만 할 뿐 속절없이 소중한 세월만 보내고 있구려. 왜 우리는 이토록 무능력한가요 … ” - 이중섭1954년 8월 14일 아내 마사코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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