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견제하느라 대선판에 휘말린 ‘미국 시민 필립 제이슨
1884년, 서재필은 스무 살 약관의 나이에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혁명이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야간 의과대학을 다니고 의사가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사면돼 방한해서는 미국인 신분으로 중추원 고문에 임용돼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창립과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해방된 지 2년이 가까워 오던 1947년 7월 1일, 83세 서재필은 49년 만에 방한했다. 인천항에는 그를 맞기 위해 민정장관 안재홍, 입법의원 의장 김규식, 대법원장 김용무 등 남조선과도정부 3부 요인을 위시해 여운형, 홍명희, 원세훈 등 좌우를 망라한 내로라하는 정객들이 총출동했다. 이튿날 이승만과 김구도 숙소인 조선호텔로 서재필을 예방했다.
1년 전, 민주의원 임시의장이었던 김규식은 좌우합작에 소극적이던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해 미군정에 서재필의 방한을 요청했다. 이승만의 비타협적 반공·반소 노선을 부담스러워하던 미군정도 서재필의 방한이 남한의 정국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1947년 1월, 미군정은 서재필에게 방한을 공식 제안했다.
그해 2월, 미국을 방문한 하지 중장은 서재필을 직접 만나 미군정 최고 고문에 취임해 달라고 부탁했다. 서재필은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교육의 임무만 수행하겠다며 방한을 수락했다. 러치 군정장관은 서재필의 방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서재필 박사는 조선 시민이 아니고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 오게 된다. 그의 임무는 군정 최고 의정관으로서 순전히 하지 중장과 미군을 위하여 고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1947년 7월, 49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가운데). 왼쪽은 김규식, 오른쪽은 여운형 /국사편찬위원회
1875년생 이승만은 1864년생 서재필보다 11세 연하였다. 20세 만학도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재학 중이던 1896년,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매주 목요일 세계사, 지리, 국제 정세 등에 대한 특강을 했다. 이승만은 서재필과 첫 대면부터 “그에 대한 신뢰감으로 가슴이 그득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서재필은 이승만에게 격려와 진로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일종의 사제 관계로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이후 미국에서 독립운동 동지이자 경쟁자로 발전했다.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한국친우회, 구미위원부 등 미국에서 벌어진 굵직한 독립운동은 대부분 두 사람이 함께 이룩한 성과였다. 다만 서재필은 이승만의 야심과 독선을 경계했고, 이승만은 미국에 귀화해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한 서재필이 한인 사회의 대표자가 되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방한 전 공언한 것처럼, 한동안 서재필은 남한 정계와 거리를 둔 채 군정청 집무실에서 미군정 최고 고문이자, 남조선과도정부 특별의정관 소임에 충실했다. 9월부터 서울중앙방송은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15분부터 15분간 서재필의 라디오 토크 ‘국민의 시간’을 편성‧송출했다. 서재필이 영어로 작성해 비서가 한국어로 번역한 원고를 서재필이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읽어 내려가는 연설이었다.
그러나 1948년 남한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절차가 진행되면서 서재필은 더 이상 정치 현안에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서재필은 남한의 정치인들이 단독선거 전에 북한의 참여를 끌어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급기야 신민일보(1948.3.14)와 인터뷰에서 서재필은 이승만을 직설적으로 공격했다. “미국은 민심의 수습과 정치적 통일을 위해 이 박사를 내세운 것입니다. 하지 중장도 그를 대단히 친절하게 접대하였고, 열렬한 성원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섭섭한 것이었습니다. (…) 이 박사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단을 향해 하지 중장은 조선에서 공산주의자를 도와주고 조선 독립을 방해하니까, 내가 그를 소환시키기 위해서 미국에 왔노라고 성명한 것입니다.”
사실을 언급한 인터뷰였지만, 이승만 지지 단체는 일제히 비난 성명을 쏟아냈다. “우리 독립에 협조하러 온 줄 알았던 서재필 박사가 의외로 선거를 반대하는 반동분자의 도구가 되어서 최고 영도자인 이 박사를 중상하여 민중과 이간을 일삼는 것은 진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미군정 관리로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결국 군정을 연장할 기도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에 대한 의견을 묻는 인터뷰에서도 서재필은 “그 정신은 극히 좋다. 남북협상이 잘 되어서 통일되기를 바란다. 통일만 된다면 나도 따라가겠다. (이승만의) 북벌론은 동족상잔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행동이다”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서재필의 기대와 달리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은 김일성과 소련에 이용만 당한 채 실패로 돌아갔고, 5‧10 총선거는 전 국민의 뜨거운 지지 속에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개원식이 열리고 있다. 개원식에는 5·10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198명(정원 200)이 참석했다. 이승만은 개원식에 앞선 예비 회의에서 국회의장으로 당선됐다. 소련은 남로당을 앞세워 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전국에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선거는 95.5%의 투표율로 마무리됐고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이승만은 투표율이 90%를 넘은 것에 대해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표명한 것"이라고 했다. /기파랑
제헌의회 원 구성이 끝나고 대통령 선거가 임박했을 때, 반(反)이승만 세력을 중심으로 서재필 대통령 추대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최능진, 백인제, 주요한 등 서북 출신 흥사단 계열의 인사들은 각계 인사 2000여 명이 서명한 간원문을 작성해 서재필에게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회복해 대통령에 출마해 줄 것을 청원했다. 훗날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24세 젊은 정치인 김대중도 간원문에 이름을 올렸다.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치러지는 초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서재필 대통령 추대 운동은 이승만계와 반(反)이승만계의 상호 비방전으로 격화되었다. 서재필은 전국민적 지지가 전제된다면 대통령에 출마할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승만과 국회에서 표 대결을 벌일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결국 대통령 선거를 2주 앞둔 7월 4일 서재필은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조선 각지로부터 나에게 조선 대통령 입후보를 요청하는 동시에 내가 출마하는 경우 나를 지지하겠다는 허다한 서신을 받았다. 나는 그들의 후의에 깊이 감사하는 한편 과거에 있어 그 관직에 입후보한 일이 없으며 지금도 그리고 장래에도 그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그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미국 시민이며 또한 미국 시민으로서 머물 생각이다.”
7월 20일, 국회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출석 의원 196인 중 180인의 지지를 받은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구가 13표, 안재홍이 2표를 받았다. 서재필도 1표를 받았으나 미국 국적자는 피선거권이 없다는 이유에서 무효표로 처리되었다.
서재필은 이승만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정부 수립 한 달도 되기 전인 9월 11일 “명이 길면 돌아오겠다. 조속히 통일국가를 수립하여 잘살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긴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노령으로 건강이 나빠진 서재필은 6‧25전쟁 발발 이듬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안타까워하며 제2의 고향 필라델피아에서 영면했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 박사가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는 모습.
<참고문헌>
박성진, ‘서재필과 이승만의 만남과 갈등’, 대동문화연구 제67집, 2009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이황직, ‘서재필 평전’, 신서원, 2020
주진오, ‘서재필, 민족을 떠난 근대주의자’, 내일을 여는 역사 제13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