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엽 어느 날 양천 현령 겸재 정선은 멀리 부여 땅을 찾는다. 오늘날 세도면 반조원리에 은거하는 조카뻘 선비 정오규를 만나기 위해서다. 백마강을 낀 은거지 주변의 빼어난 경치에 반한 그는 붓을 들어 ‘임천고암(林川鼓巖)’을 그린다. 임천은 이 일대의 옛 이름이며 고암이란 북을 닮은 바위란 뜻이다.
오른쪽 백마강을 낀 절벽 위에 기품 있는 정자가 다소곳이 자리를 잡았다. 왼쪽으로 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ㄱ자 집 두 채는 은거하는 선생의 살림집이다. 뒤로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숲을 이룬다. 이 솔숲은 지금도 그대로다. 주위를 압도하듯 우뚝 솟은 산은 토성산이다. 실제는 높이 114m에 불과한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부분적으로 과장하여 나타낸 것이다. 다른 겸재 그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토성산과 마주하는 백마강 건너에는 백제의 역사를 간직한 석성산성과 연결된 파진산이 보인다.
그림의 가운데 정자 앞마당에 3그루의 큰 나무가 화면의 중심을 잡고 서 있다. 족히 두 아름은 됨 직한 우람한 은행나무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는 아름드리 전나무와 멋스럽게 늘어진 가지가 돋보이는 능수버들 고목을 거느렸다. 모두 선비들이 즐겨 심고 가꾸던 나무들이다. 능수버들 아래에는 지팡이를 짚고 사방관에 도포를 입은 선비가 동자를 데리고 한가롭게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택의 사립문 앞에는 소를 몰고 가는 농부의 모습이 은거하는 선비의 여유로움을 더한다. 아래로 사각 연못까지 갖추고 있어서 선비의 집으로 모자람이 없다.
앞쪽 급경사 언덕에는 곧게 뻗은 전나무 두 그루와 느티나무가 계단 쪽으로 잔가지들을 아래로 드리웠다. 그림 속의 고목나무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이 느티나무는 원줄기의 둘레가 두 아름 반에 이르는 큰 나무가 되어 지금도 자리를 지킨다. 이어서 8개의 계단이 보이고 절벽 아래에는 좁고 긴 나룻배 한 척이 백마강 유람을 떠날 주인을 조용히 기다린다. 절벽을 따라 띄엄띄엄 작은 나무와 덩굴식물이 늘어져 있을 뿐 가파른 바위가 그대로 드러난다. 270여 년 전의 이 일대가 그대로 손에 잡힐 듯하다. 안타깝게도 1990년 금강 하구 둑을 막으면서 수위가 3~4m나 올라온 탓에, 옛 풍광은 많이 변해 버렸다. 그러나 겸재의 산수화 속 풍경 중에 이 정도나마 당시의 아름다운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