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8 21:00:03
소녀의 빨래와 비누
조지 던롭 레슬리, 우리는 이렇게 빨래해요, 1887년, 캔버스에 유채, 61×46㎝, 영국 베빙턴시 레이디 레버 미술관 소장.
입춘을 지내면 묵은 빨래를 하게 된다. 장밋빛 뺨의 인형 같은 여자아이가 의자 위에 올라서서 빨래하는 법을 보여준다. 테이블 위에 물이 흥건한 걸 보니 제법 열심히 조물거린 모양이다. 손빨래란 고된 노동이 틀림없는데, 봉긋한 뽕소매에 섬세한 레이스를 두른, 풍성한 빨간 드레스를 입고 비누를 쥐고 있으니 빨래도 순식간에 사랑스러운 놀이가 된다. 이는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주로 여성들의 일상을 동화처럼 예쁘게 그린 그림으로 대중과 평단 모두의 인정을 받았던 화가 조지 던롭 레슬리(George Dunlop Leslie·1835~1921)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존 러스킨은 레슬리가 ‘영국 소녀시대의 달콤함’을 그려냈다고 격찬했다.
이 작품은 영국 북서부 베빙턴시 포트 선라이트 지역에 있는 레이디 레버 미술관 소장품이다. 영국의 사업가, 미술 컬렉터이자 정치인이었던 윌리엄 헤스케스 레버가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레이디 레버’를 기리기 위해 지은 미술관이다. 부친의 식료품점에서 일하던 레버는 당시 널리 사용되던 동물성 수지 대신 식물성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고 공장이 있던 동네 이름을 딴 상표 ‘선라이트’를 출원했다. 그리고 그는 광고에 사용하기 위해 레슬리의 이 그림을 산 뒤, 포장과 포스터에는 그림 속 테이블 위에 눈에 띄게 ‘선라이트 비누’를 얹었다. 그때까지 비누 브랜드란 없었고 다만 가게에 큰 덩어리를 두고 잘라 파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이토록 달콤한 영국의 소녀시대를 담은 비누가 등장하자 주부들이 열렬히 호응했고, 레버는 엄청난 부를 얻었다. 오늘날 세계적 생활용품 기업인 ‘유니레버’가 이렇게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