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담아낸 작품들
화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혼자 돌아다니며 사물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릴 때는 하루 몇 시간이고 고민하며 말도 없이 혼자 작업하지요. 이 때문인지 화가를 두고 “예술을 위해 스스로 고독한 삶을 선택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시인이나 소설가처럼 글을 쓰는 작가도 자신의 작품 세계에 홀로 머무르기는 아마 매한가지일 거예요. 화가는 그림밖에 모르는 ‘그림쟁이’, 시인이나 소설가는 글밖에 모르는 ‘글쟁이’라고 불리곤 하지요. 환경이 비슷했기 때문일까요. 그림쟁이와 글쟁이는 서로를 평생의 친한 친구로 두고 창작의 외로움을 달래곤 했답니다. 그들이 어떻게 우정을 키웠는지 살펴볼게요.
①구본웅‘, 친구의초상’(1935) ②폴세잔, ‘커튼이 있는 정물’(1898) ③이중섭, ‘두 어린이와 복숭아’(1953) ④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국립현대미술관·에르미타주미술관·이중섭미술관·환기재단·환기미술관
◇”그림 속에서라도 좋아하는 것 하라”
<작품 1>은 화가 구본웅(1906~1953)이 소설가 이상(1910~1937)을 그린 ‘친구의 초상’입니다. 구본웅은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고 선천적인 척추 질환을 앓았어요.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과는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는데, 두 사람 모두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똑똑했다고 해요.
이 작품은 구본웅이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화가로서 이름을 날리던 1935년, 이상과 늘 붙어 다니던 시절에 그린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거리를 거닐 때면 사람들이 종종 쳐다봤다고 해요. 이상은 머리와 수염을 다듬지 않아 텁수룩한 데다가 당시 폐결핵으로 얼굴은 창백했지요. 반면 척추 질환을 앓아 등이 구부정한 구본웅은 땅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긴 망토 같은 옷에 몸을 숨기고 다녔거든요. 이상은 이 무렵 평소 좋아하던 담배를 병 때문에 입에 대지도 못했지만, 그림에서는 파이프를 물고 있습니다. 그림에서라도 실컷 담배를 피우라는 친구의 마음이 담겨 있네요.
◇과일 속에 담긴 우정
<작품 2>는 프랑스의 미술가 폴 세잔(1839~1906)이 그린 사과 그림입니다. 그림 속에서 사과는 진짜 사과처럼 먹음직스럽게 표현돼 있지 않고, 그저 동그란 입체 형태를 띠고 있는데요. 그는 “그림 속의 사과는 그림다워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실물과 똑같이 사과를 그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건데요.
그는 왜 사과 그림을 그렸을까요. 세잔에게는 사과에 얽힌 추억이 있었어요. 1852년 9월 프랑스의 시골 마을인 엑상프로방스의 부르봉 중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었어요. 훗날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가 된 어린 에밀 졸라(1840~1902)는 사과 세 개가 든 바구니를 세잔에게 건넸습니다. 어린 시절의 졸라는 발음이 부정확해 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됐다고 하는데요. 세잔은 늘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해주곤 했습니다. 그런 세잔에게 줄 것이 없던 졸라는 사과라도 갖다주며 고마움을 표시했던 것이죠.
두 사람의 우정은 어른이 돼서도 계속됐어요. 대도시 파리로 이사가 일찌감치 작가로서 성공한 졸라는 새 책을 낼 때마다 서명을 한 첫 인쇄본을 우편으로 세잔에게 보내줬어요. 하지만 오해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연락이 뜸해졌고, 그러는 동안 졸라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세잔은 작업실에 들어가더니 며칠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해요. 친구 곁을 지키지 못한 후회 때문이었겠지요.
이번엔 복숭아 그림을 볼까요? <작품 3>은 화가 이중섭(1916~1956)이 그린 ‘두 어린이와 복숭아’인데, 그림 가운데에 아기 엉덩이같이 포동포동한 커다란 복숭아가 보입니다. 복숭아는 예로부터 동북아시아 삼국인 한국·일본·중국에서 특별한 과일로 여겨졌어요. 하늘의 임금인 옥황상제가 아끼는 과일이며 신선들이 먹는 과일로, 사람들은 복숭아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지요.
이중섭에게도 복숭아에 얽힌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이중섭의 절친한 친구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가난했던 그는 아픈 친구에게 복숭아를 사 줄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대신 탐스럽게 그린 복숭아 그림을 머리맡에 붙여주며 “이걸 먹고 어이 빨리 나으란 그 말씀이지”라고 말했대요. 그 친구가 바로 이중섭이 일본 유학 시절에 알게 돼 평생지기로 지냈던 시인 구상(1919~2004)이에요.
그때 받았던 복숭아 그림은 구상이 평생 간직하면서 힘들 때마다 봤다고 하는데요. 끝내 어떤 그림인지 공개되지는 않지만 이 작품 ‘두 어린이와 복숭아’ 그림과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친구 시 읽고 그린 그림
<작품 4>는 김환기(1913~1974)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입니다. 김환기는 평소 시를 읽고 쓰기를 좋아했고, 그림을 그릴 때도 시에서 영감을 얻곤 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서울 성북동에 살던 시절 ‘성북동 비둘기’를 쓴 시인 김광섭(1906~1977)을 알게 됐어요. 김환기가 서울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인 미국 뉴욕에서 지낼 때도 김광섭과는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1970년대 김환기는 그리움의 감정을 점으로 찍어 표현하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읽고 그 느낌을 담아낸 바로 이 작품이에요. 그림의 제목은 시의 끝 부분에서 따온 거라고 해요. 김환기는 이 그림에 뉴욕에서 생활하는 동안 매일매일 밤하늘을 바라보며 고향의 친구들과 고국의 하늘, 그리고 별을 하나하나 헤아리던 마음을 담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우정처럼, 시와 그림이 연결돼 걸작이 탄생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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