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5 10:48:01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4/2020042402704.html
방직공장 여공·사시합격·입양·의원 당선… 김미애의 인생역전
[곽창렬 기자의 열창]
부산 해운대을 당선인, 미래통합당 김미애
지난 20일 저녁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는 선거 캠프 사무실에서 만난 김미애 당선인. 파란색 정장 차림에 굽이 8㎝쯤 되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김 당선인은 "나는 멋 내는 것을 좋아한다"며 "나도 잘 살고, 내 주변 사람들도 잘 살도록 돕는 게 내가 지향하는 삶"이라고 말했다.
2018년 10월, 김미애(52·金美愛) 변호사 휴대전화에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자유한국당 김세연 의원(부산시당위원장). 김 변호사는 보좌관을 통해 ‘만나자’던 김 의원 제안을 한 차례 거절한 상황이었다. 김 의원은 직접 문자를 보내 “식사가 안 되면, 차라도 한잔 마시자”고 요구했다. 둘의 만남은 성사됐고, 이 자리에서 김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당이 위기입니다. 나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할아버지의 기업,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시민들이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변호사님처럼 스스로 일어선 분이 정치하셔서 우리 당을 바꿔야 합니다.”
김 의원은 왜 그런 문자를 보낸 것이었을까. 일찌감치 고아가 된 소녀. 17세에는 부산 방직공장에서 밤새 실타래를 돌렸던 여공(女工). '짝퉁' 스카프를 팔고 초밥집에서 툭하면 칼에 손을 베이던 20대 시절. 뒤늦게 들어간 야간대학. 5년여간의 사시 준비. 762건의 국선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결혼한 적 없고, 한 번도 자신의 배 아파 낳은 아이도 없지만, 지금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 김 변호사의 이력서다.
1년 전, 그녀는 아이 셋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엄마가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선거에 나갈 거다. 대한민국을 위해 일할 거야." 아이들 반응은 저마다 달랐다. 당시 19세이던 첫째(작은언니의 아들)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초등학교 6학년 둘째(큰언니의 딸)는 "이모 같은 사람이 정치하는 게 맞아. 근데 이모가 선거에 떨어질까 봐 걱정돼", 직접 입양한 막내인 초등학교 2학년 딸은 "엄마 좋아. 그래도 꼭 나와 놀아줘야 해"라고 했다.
미래통합당 공천을 받아 21대 총선(부산 해운대을)에 나선 '싱글맘' 김미애는 53%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가 통합당보다는 민주당 후보로 더 어울린다고 했다. 20일, 부산 해운대에서 김 당선자를 만났다.
43세에 아이 셋 키운 싱글맘
인터뷰가 있던 날 아침, 김 당선인은 초등 3학년이 된 막내딸을 깨워 노트북 앞에 앉혔다. 이날은 아이가 온라인으로 등교하는 첫날. 겨우 아이를 앉혀 놓고 당선 인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데, 딸에게서 계속 전화가 왔다. '엄마, 안 돼, 모르겠어….'
김 당선인은 방 네 개짜리 아파트에서 아이 셋과 함께 산다. 이날 전화를 건 막내는 2011년 입양해 자신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렸다. 첫째는 작은 언니의 아들. 막내를 입양한 그해, 언니가 백혈병을 얻어 사망할 무렵 그는 조카의 미성년후견인이 돼 집으로 데려왔다. 처음이 아니었다. 그 3년 전인 2008년 12월에는 큰 언니가 남편의 사망 등 으로 우울증에 걸리자 19개월이던 언니의 딸을 데려와 키웠다(둘째). 세 아이의 성(姓)은 각각 '위' '안' '김'으로 다르지만, (이모)엄마의 이름은 하나다. 김미애다.
―선거 내내 아이들을 등장시키지 않았다.
"아이들의 현재 모습을 공개한 적이 없다. 뒤통수나, 마스크 쓴 모습만 살짝 보였을 뿐이다. 몇 년 전에 KBS '인간극장'에서 우리 가족을 찍고 싶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물론 난 괜찮다. 아이들도 텔레비전에 나가는 거 좋아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미성년자라서 진정한 의사라고 보기 어렵다."
―언니들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도 입양했다.
"엄마가 15세에 돌아가셨다. 20세까지는 엄마가 무덤에서 살아나는 꿈을 꿀 정도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하지 못하면 입양해서라도 아이를 키우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다. 사람들이 나보고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내가 입양 안 했으면, 행복하게 살았을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 가정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 그 어떤 좋은 시설도 엄마·아빠를 대체할 수 없다. 막내에게도 입양을 말해줬다. 내가 너무 원했고, 최고의 선물로 주신 게 너라고. 그래서 지(제)가 최고의 선물인 줄 안다."
―결혼해서 직접 아이를 낳아도 됐을 텐데(웃음).
"나를 좋아하는 남자도 몇 있었다(웃음). 그런데 그분들은 그냥 나를 좋아했던 거지, 내 아이들을 좋아하고, 내가 추구하는 삶을 같이 공유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태석 신부 같은 사람이다. 남수단의 신발을 신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직접 발을 그려 신발을 만들어주신 그 마음을 사랑한다."
1986년 당시 18세 김미애(맨 윗줄 맨 왼쪽)가 부산시의 한 봉제 공장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 2016년 8월 여름방학을 맞아 부산지방법원 형사법정을 방문한 세 아이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김미애 당선인은 "'왜 보수 정당으로 갔느냐'는 얘기를 들을 때 가장 속상하다"며 "나는 보수의 가치를 신뢰하고 자유를 존중한다"고 말했다. "나처럼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이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박수받을 일이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여공에서 초밥집 사장이 되다
"여러분 제가 이곳에 35년 만에 섰습니다. 학교 다닐 버스비도 없었던 17세 김미애가 살기 위해 찾아온 공장입니다."
지난 2일, 김 당선인은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는 태광산업 공장 앞에 유세 차량을 세우고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이날은 21대 총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소녀 김미애는 1985년 고향 포항을 떠나 부산으로 왔다. 방직공장에 취직해 '공순이'라 놀림당하던 소녀는 35년 후 바로 그곳에서 선거 출정식을 가졌다.
―그때의 소감은.
"꿈 같았다. 그리고 감사했다. 열일곱 살 당시는 정말 우울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상상 못 했다."
―어릴 적 삶은 어땠나.
"부모님 고향은 제주인데, 아버지가 배 사업을 하러 포항으로 가셨다. 그런데 사업이 망했다. 차비가 없고, 도시락을 못 싸 굶을 정도로 가난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해녀로 생계를 책임지던 엄마가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 늘 방에 누워 계셨다. 제발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엄마를 리어카에 태우고 30분 거리에 있는 교회로 갔다. 15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그가 스무살 즈음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보다는 여성 청소년의 공장 취직이 줄던 시절인데.
"친한 친구 가운데 중학교 졸업 후 부산에 있는 공장에 취업한 애가 있었다. 그 친구가 하루는 주말을 맞아 고향 집에 왔다. 1985년 5월 비가 오는 날, 그 친구를 따라 부산으로 갔다. 당시 부산·경남 공장에는 일자리를 찾아 취업한 친구가 많았다. 기숙사에는 수백 명의 또래 여학생이 있었다. 한 방에는 7~8명 정도가 함께 살았다. 일렬로 누우면 방에 빈틈이 없었다. 근무는 오전(오전 6시~오후 2시), 오후(오후 2~10시), 야간(오후 10시~다음 날 오전 6시) 3교대로 진행됐다. 나는 실이 끊어지면 다시 실을 잇는 작업을 했다. 실타래를 꽂으면 빠르게 회전하기 때문에 새벽에 졸면 곧바로 손이 날아갈 수 있는 작업이었다."
―공장 나와서는 초밥집을 열었다.
"어른이 되면 좋은 일을 하면서 대학도 다니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스무 살이 돼도 그런 삶이 펼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공장을 관두고 일본어를 배웠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많았다. 이들을 상대로 짝퉁 핸드백이나 스카프를 파는 잡화점에서 일했다. 한 달에 50만원을 벌었는데, 방세·교통비 등을 빼고 25만원가량을 저축했다. 그렇게 3년 만에 1000만원을 모았다. 이후 폼나는 식당을 차리자는 생각에 초밥집을 하게 됐다."
―초밥집은 잘됐나.
"1994년부터 2년간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내가 주방장, 설거지·청소, 계산대 보는 것까지 혼자 다했다. 아침 7시에 장보고 자정에 문을 닫았다. 한겨울에도 맛을 유지하기 위해 찬물로 초밥을 만들었다. 아직도 손가락에 칼에 벤 자국이 있다. 그렇게 살았더니 손님들이 감동하더라. 돈은 참 잘 벌렸는데, 공허함도 컸다."
―공허라니.
"당시 일반 음식점은 자정까지밖에 영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자정쯤이 돼서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그 시각 늘 오시던 단골손님 한 분이 밥을 먹고 있었다. 그분이 먹던 음식을 마저 먹고 가겠다고 했다. 나는 가게 문을 닫기 위해 청소를 했고, 그분은 그대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 구청 위생과 공무원으로부터 단속을 당했다. 그러더니 자기가 불러주는 대로 종이에 적으라고 하더라. '언제, 남자 손님 한 명이 소주 한 병, 안주 하나 먹고 있었다'는 식이었다. 사실 자체는 맞으니까 그대로 썼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자백하는 일종의 진술서였다. 정말 억울했다. 이중·삼중으로 문 닫은 척 영업하는 유흥업소는 단속 안 하고, 힘없는 할머니나 나처럼 어려운 사람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속한 것이다. 결국 그 일로 영업정지 1개월을 먹었고, 가게 문을 닫았다. 그런데 10년 후, 변호사가 돼 공적인 자리에 지원하기 위해 범죄경력조회서를 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일로 내가 벌금 30만원을 받은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때 경험이 변호사나 정치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중에 변호사 돼서 내가 부산시 행정심판위원을 했다. 저 사람이 왜 저랬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건의 이면(裏面)을 보려고 애를 썼고, 생계형은 많이 감경(減輕)해 주려고 노력했다."
아이·여성 돌보는 변호사로 변신
1995년 그렇게 초밥집을 접은 후, 이듬해 김미애는 다시 수능 공부를 해서 동아대 법대(야간)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이후 5년간 사법시험 준비. 2002년에 합격했다. 그 5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가 다시 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공장 다니고, 초밥집 하면서 세상의 부조리를 봤다. 그래서 변호사를 하자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 공부할 때가 정말 행복했다. 어릴 적 그렇게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돈도 없었고, 도와주는 사람 한 명이 없었다. 그런데 대학 들어가서 공부만 열심히 했더니 모든 게 다 되더라. 공부 열심히 했더니 학교에서 장학금을 줬고, 고시반 입실 시험에 합격하니까 기숙사 방을 주더라. 월세를 아낄 수 있게 된 거다. 거기에 밥도 세끼를 다 줬다. '세상에 이런 데가 어디 있느냐'고 생각했다. 내가 공부한 동아대 도서관은 천국 같은 곳이었다. 구석진 창가에 내가 고정적으로 맡아 놓은 자리가 있었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앉으면 물소리와 새소리가 들렸다. 맑은 정신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 고마움 때문에 나는 쓰레기가 보이면 주워 담았고, 칠판도 닦았고, 기숙사 세면장 창문에 붙어 있던 선팅지(햇빛을 막아주는 종이)가 떨어지면 직접 내 돈으로 사서 바르고 그랬다. 변호사가 된 후에 2006년부터 지금까지 모교에 장학금 1억원을 냈다."
―변호사가 된 후에는.
"나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은 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와 관련된 활동을 많이 했다. 소년분류심사원에서 늦게까지 소년범 아이들을 접견했다. 아이들과 말을 좀 더하고 싶은데 접견 시간 다 됐다고 빨리 안 가느냐고 해서 싸운 적도 많았다. 지금도 아이들에 대한 접견 시스템이 어른하고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하다. 가난한 소년·여성 등의 변호를 포함해 국선변호만 762건을 하게 됐다."
지난 15일 밤 총선 승리가 확정되자 지지자들과 환호하는 김미애 당선인. 김 당선인이 손을 잡은 왼쪽은 막내, 오른쪽은 둘째(큰언니의 딸)다.
"왜 그 당에 들어갔느냐" 가장 고통스러워
―삶의 궤적이 보수 정당과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내가 선거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도대체 왜 그 당에 가느냐'는 말을 들을 때였다. 심지어 우리 당에 있는 사람조차도 그렇게 얘기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당에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인가. 웰빙하고, 많이 배우고, 부자에 화려한 스펙을 가진 사람이 와야 박수 칠 건가. 나는 당의 강령과 당헌을 모두 읽어봤다. 이 당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어떤 점이 맞았나.
"나는 보수의 가치를 신뢰하고, 자유를 존중한다. 물론 평등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꿈을 이루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주는 게 맞는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나보고 구질구질하게 살라 하면 나는 못 산다. 열심히 살아서 내가 잘살고, 그걸로 어려운 사람 돕자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그들(진보 진영) 가운데 일부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 대해 존중하지 않더라. 뭐하러 그렇게 치열하게 사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명품을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는 사람을 봤다. 또 자사고나 특목고 반대하면서 자기 아이들은 거기 보내고, 또 미국 유학도 보낸다. 최강욱 당선인 봐라. 일제 차 렉서스 탄다는데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면서 자신만 옳은 척 대중을 선동한다. 그런 식으로 사는 게 역겨웠다. 나처럼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이 부자로 살고 싶은 것은 자유다. 박수받을 일이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이번에 보수 정당은 왜 참패했나.
"공감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국민은 함께 울어주고, 넘어지면 손잡아서 일으켜 주는 정치를 원하는데, 우리 당의 모습은 폼잡고, 의전 좋아하는 것으로 비쳤다. 1년간 선거 준비하면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는데, 그때 참 힘든 게 있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봉사하기를 원했다. 산불이 났던 운봉산에 직접 올라가서 잔불 정리를 했다. 급식 봉사 가서 식판 나르고, 설거지했다. 그런데 일부는 '별나게 하지 마라'고 하더라. 쓰레기 주우러 가면 열심히 쓰레기 줍는 거 말고, 사람들 쳐다보고 인사하고 하라고 했다. 봉사하러 가서 실제로 열심히 하는 게 별난 거였다. 전부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모습이 많았다."
―대한민국에서 사다리가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선거운동 막판, 저녁 시간에 카페나 음식점을 찾아 젊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내 이력이 적힌 명함을 내밀고,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20대를 만나 보니 10명 가운데 9명은 내 말에 공감했다. ‘정말 힘들 때 꼭 전화하라’고 했다. 20대는 우리 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좀 더 열심히 이들을 만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들에게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정치를 하겠다. 국회에 들어가면, 로스쿨을 가지 않고도 변호사가 될 수 있도록 ‘예비시험(일종의 사법시험)’을 도입하는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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