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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한국 미술사

[살롱 드 경성]“하늘이 허락한다면 내 목숨을 당신께 넘겨주고 싶었소”...김기창 박래현

by 주해 2023. 1. 7.

“하늘이 허락한다면 내 목숨을 당신께 넘겨주고 싶었소” 

 

“하늘이 허락한다면 내 목숨을 당신께 넘겨주고 싶었소”

하늘이 허락한다면 내 목숨을 당신께 넘겨주고 싶었소 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삶과 예술의 뜨거운 동반자 부부 화가 김기창과 박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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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예술의 뜨거운 동반자
부부 화가 김기창과 박래현

박래현, 김기창 합작, ‘봄’, 1956년경, 아라리오컬렉션. 사랑의 전설을 지녀 ‘부부애’를 상징하는 등나무와 그 주위에 날아든 참새의 모습을 담았다. 격렬하게 휘감아 올라간 등나무와 등꽃을 박래현이 그렸고, 주변에 어우러진 참새와 벌을 김기창이 그렸다. 박래현의 대담성과 김기창의 재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운보 김기창(1913~2001)’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는 한때 한국 사회에서 ‘인간 승리’의 전형으로 통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극복하고 화가로 성공했으니 말이다. 1913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7살에 장티푸스를 앓고 청각장애인이 된 그는, 보통 사람처럼 읽고 쓰고 의사소통을 했을 뿐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분명 김기창의 대단한 의지와 노력이 있었겠지만, 오늘 할 얘기는 김기창의 성공담이 아니다. 그의 영광 뒤에 가려진 채, 기꺼이 든든한 그늘이 되어 준 두 여인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김기창의 어머니와 그의 화가 아내 박래현의 이야기를.

◇“어머님의 넋이 깃든” 그림

‘인간 승리 김기창’을 가능케 한 것은 일차적으로 그의 어머니 한윤명 여사(1895-1932)였다. 그녀는 진명여고보 1회 졸업생으로 화가 나혜석, 의사 허영숙(소설가 이광수의 아내)과 동기 동창이었다. 매우 지적이고 인품이 훌륭했던 인물로, 개성의 정화여학교와 경성의 태화여자관에서 교사로 생활했으며, 나중에는 세브란스 치과 병원 직원으로 근무했다. 한때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학교장이 미국 유학을 주선하려 했으나, 남편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김기창은 어머니의 앞길을 열어주지 못한 아버지를 평생 원망했다. 더구나 후에 김기창의 부친은 증권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집을 나갔기 때문에, 한윤명은 장애가 있는 장남 김기창을 포함한 자녀 8명을 혼자 키우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한윤명은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학교에서는 그저 아무것도 듣지 못해 노트 빈자리에 그림만 그리던 김기창을 앉혀 놓고, 한글과 일본어를 읽고 쓸 수 있도록 직접 가르쳤다. 특수교육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 언어를 교육한다는 것은 눈물겨운 노력을 동반했으리라. 다행히도 김기창은 고요의 세계 속에서 글 읽기의 즐거움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는 글을 익힌 후 누구보다 많은 책을 읽었고, 글도 참 잘 썼다.

김기창에게는 전부였을 어머니가 그의 나이 19세 때 갑자기 돌아가셨다. 김기창을 화가 김은호의 화숙에 보내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킨 지 딱 2년 만이었다. 김기창은 이후 스승의 보호를 받으며 피나는 노력으로 일취월장 실력을 쌓아나갔고, 조선미술전람회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며 27세에 추천 작가 반열에 올랐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혜석은 김기창의 그림을 보고, “기창군의 그림에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넋이 깃든 것 같다”고 말했다.

김기창, ‘군마도’, 1955,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김기창은 뛰어난 기량의 화가로, 특히 동물화의 일인자였다. 약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면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진하는 말들의 힘찬 운동감이 압권이다.

◇김기창과 박래현의 만남

1943년 김기창이 30세 되던 해, 그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재능 있고 인격이 훌륭한 박래현(1920~1976)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박래현이 일본여자미술학교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잠시 서울에 머물 때였다.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박래현은 학교 선생이었던 아는 언니의 가정방문을 따라가서, 방문 학생의 오빠인 김기창을 만나 처음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이들은 3년간의 필담 연애 끝에 1946년 결혼식을 올렸다. 박래현의 부모님은 결혼을 결사반대하여 식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김기창은 아예 부모님이 안 계셨으니, 친구들만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세간에서는 장애 화가와 엘리트 여성의 만남을 대서특필했다.

박래현, ‘단장’, 1943, 개인소장. 박래현이 일본 유학시절 하숙집 주인 딸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박래현의 데뷔작이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대목은 ‘박래현의 선택’이다. 그녀는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한 신분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김기창을 만나 어떻게 결혼까지 하겠다는 담대한 생각을 했던 걸까? 박래현은 스스로 “그저 간단하게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 예술가와 결혼하면, 계속해서 예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박래현이 내건 결혼 조건은 단순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술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여건을 만들 것.” 그리고 “서로 인격과 예술을 존중할 것.” 그것이 가능하다면 신체 장애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길 만큼, 박래현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박래현과 김기창의 결혼사진, 1946, 개인소장. 박래현이 앞에 서서 당당한 포즈를 취한 것이 인상적이다.

◇삶과 예술의 동반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박래현의 선택은 옳았다. 김기창과 박래현은 서로의 예술을 진심으로 존중했다. 부부는 집에 화실을 만들어 함께 작업에 열중했고, 수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이들은 1947년부터 거의 2년에 한 번씩 ‘부부전’을 열어 평생 12번의 부부전을 개최했다. 1958년 이후에는 한국을 넘어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으며, 뉴욕, 타이베이, 마닐라, 하와이, 앨런타운 등에서 그룹전과 부부전에 출품했다. 해외 전시를 계기로, 부부는 일찍부터 외국에 자주 나갈 수 있었고, 전 세계 문화와 예술에 대한 안목을 넓혀갔다.

그러나, 이러한 활약 이면에는 두 사람 모두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누구보다 박래현에게 남편의 장애는 차츰 현실로 다가왔다. 특히 자녀들이 태어나자, 아이들과 대화하지 못하는 김기창의 모습은 참담했다. 박래현은 김기창에게 ‘구화술(口話術)’을 익히게 해서, 사람의 입 모양만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김기창은 스스로 듣지 못하는데도 발성을 연습해 어눌하지만 말하는 방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박래현, ‘이른 아침’, 1956, 개인소장. 이른 새벽 자는 아기를 둘러업고 생계를 위해 바쁘게 길을 나서는 여인들의 모습을 담았다.

◇박래현의 낮과 밤

박래현은 장애인이 할 수 없는 온갖 집안 대소사를 처리해 가며, 네 자녀를 양육했다. 밥 짓기, 청소하기, 기저귀 빨기 등 끝도 없는 집안일을 하고 난 후, 박래현은 밤이 되면 비로소 작품 제작에 매달렸다. 그런 와중에도 1956년 한 해 동안 박래현이 해낸 일을 보자. 그녀는 그해 1월 넷째 아이를 출산했고, 5월 제5회 부부전을 열었다. 6월 ‘이른 아침’이라는 작품을 그려 대한협회전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11월 ‘노점’으로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전쟁이 막 끝나고 먹고살기도 힘든 시기, 이런 대작(大作)을 그렸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인데, 박래현은 그 대작에 이전의 한국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신선하고 감각적인 선과 색을 도입했다.

박래현, ‘노점’, 1956, 개인소장.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이다. 한국전쟁 후 한국화 분야에 새로운 양식을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낮 시간에 온갖 집안일로 헌신을 다하기 때문에, 밤 시간만큼은 박래현에게 온전한 자유가 주어졌다. 그 자유를 박래현은 그리고 싶은 작품을 맘껏 그리는 데 바쳤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경험과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 그림을 그렸다. 그중에서도 ‘밤과 낮’이야말로 박래현의 심리 상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두 여인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한쪽은 낮의 여인을, 한쪽은 밤의 여인을 표상한다. 가만히 손을 모으고 고양이를 재우는 편안함을 지닌 낮의 여인과는 달리, 검은 실루엣의 밤 여인은 신경질적인 선으로 그려진 축 늘어진 새의 모습을 마주하며 침잠해 있다. 낮에는 일상의 주부로, 밤에는 예민한 감각의 예술가로 ‘이중생활’을 해야 했던 박래현의 모습이 여지없이 투과된 작품이다.

박래현, ‘밤과 낮’, 1959,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밤과 낮의 두 여인을 겹쳐, 이중적인 자아의 내면세계를 표현했다.

박래현, ‘달밤’, 1960년대 초, 개인소장. 밤에 온전한 자유를 누렸던 박래현은 스스로를 ‘부엉이’에 자주 투사했다. 먹물이 아교의 농도에 따라 독특하게 번지는 효과를 활용하는 등 기법적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박래현은 살아있는 동안 김기창의 그늘에 가려져 있기를 즐긴 것 같다. 비유하자면 김기창이 낮과 같은 존재라면, 박래현은 밤이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해설을 요구받을 때도 박래현은 거의 말을 아꼈다. 항상 김기창이 드러나고 조명받았다. 대신 박래현은 밤의 시간에 숨어서 자신의 영역을 개척했다. 돌이켜보면, 박래현의 전략은 현명했다. 그녀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했고, 20세기 한국미술사를 통틀어 독보적인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늘 변화했고 매번 젊었다.

특히 박래현은 1960년대 외국 여행에서 얻은 영감을 통해 추상화의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그녀는 마야, 아즈텍 문명, 이집트와 중국 고대 문명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에 매료되어,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그러한 고대 유물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토대로, 박래현은 인류의 원형, 태고의 신비, 역사의 상흔, 생명의 환희 같은 주제를 자신만의 추상 언어에 녹여냈다. 커다란 화면에 아교를 많이 섞어 반짝이는 하얀 바탕재를 만들고, 그 위에 황(黃), 적(赤), 흑(黑)의 3색 안료가 번지고 스미는 효과를 자유자재로 발휘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폐허에서 빛나는 보석 같은 신비를 담은 작품들이다.

박래현, ‘작품’, 1963년경, 개인소장. 한국화 기법으로 추상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품이다. 먹물의 번지는 효과와 신비로운 색채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박래현, ‘영광’, 1966-6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황, 적, 흑의 3가지 색과 추상적인 형태를 통해, 오래된 폐허에서 빛나는 영광의 순간을 발견하는 것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살아남은 자의 임무

살아있는 동안 박래현의 예술적 성취는 그다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기창만은 그녀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박래현을 위해 예술을 계속할 여건을 만들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김기창이 박래현에게 했던 가장 놀라운 지원은, 1969년부터 약 7년간 박래현이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운 일이다. 김기창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에게 해드리지 못한 것, 그것을 김기창은 아내 박래현을 위해 해낸 것이다. 아직은 어린 자녀를 데리고 한국에 홀로 남은 김기창은, 박래현이 “실컷 공부하고 지혜의 보물을 가지고 오면, 나도 그걸 골라 갖기로 하지”라며 ‘쿨하게’ 부인을 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너무 무리했던 탓이다. “죽으면 다 자는 잠, 살아서 왜 자냐”며, 밤에도 자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던 탓이다. 박래현은 1976년 1월, 56세의 나이로 갑자기 영면(永眠)에 들었다. 사인(死因)은 간암이지만 과로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판화를 연구하면서, 판화에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을 융합한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던 때였다.

박래현, ‘고완(古翫)’, 1975, 개인소장. 박래현이 죽기 직전에 제작한 작품으로, 판화와 한국화 기법을 융합한 시도가 매우 독창적이다. 이 기법을 통해 화가는 어두운 배경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형상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늘 새로움을 탐구하는 박래현의 전도(前途)를 누구보다 기대했던 김기창에게 박래현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다. “그때 내 심정은 내 목숨과 당신 목숨을 바꾸고 싶었소. 당신이 남아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소. 만일 하늘이 허락해 준다면 기꺼이 내 목숨을 당신께 넘겨주고 싶었소.”(김기창, ‘나의 아내 박래현’ 중에서)

김기창은 박래현의 사후(死後), 그녀의 유작전, 10주기전, 판화전 등 여러 전시를 열어주었다. 박래현이 죽고 난 후에도 김기창은 ‘약속’을 지킨 것이다. 김기창의 이력에는 화가 박래현을 외조했다는 항목을 넣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만큼, 박래현이 작업에 몰두하는 여건을 만들고, 그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김기창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고려하면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박래현은 그런 대접을 받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 예술가였다. 언제나 신선하고 도전적인 화가였다. 검은색을 좋아했고, 까만 밤을 사랑했던 화가, 밤을 비추는 반짝이는 불빛 같은 작품을 남긴 채, 불꽃처럼 사라진 화가였다.

박래현, ‘어항’, 1975, 개인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