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등 시인들과 교감한
근현대문화계 ‘핵인싸’ 김환기
대표작 중 하나인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미국에서 시인 김광섭의 ‘가짜 부고'를 듣고 애도하며 캔버스 가득 푸른 점을 채워 만들었다.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2년 전 김환기(1913~1974)의 작품 ‘우주’가 한국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132억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이 신문지 상을 도배했던 날, 나는 우연히 인터넷 기사 댓글을 보게 되었다. 간혹 이런 댓글이 눈에 띄었다. “말이 되느냐?” “이런 게 무슨 132억원이냐” “그림 값은 사기” “현대미술은 그들만의 리그”….
이런 반응이 이해되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환기가 살아온 세월, 그의 피땀 어린 노력, 끝없는 고뇌, 뭔가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는 강박에 가까운 의지, 그러한 의지 때문에 쇠약해진 건강, 주변인의 희생, 과로로 인한 사망, 그 모든 것에 생각이 미치면 ’132억원이 대수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작가는 정작 살아생전 그 비슷한 돈도 만져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김환기의 ‘항아리'(1955). 오른쪽에 서정주의 시 ‘기도’가 쓰여 있다.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섬 출신의 키다리 청년
김환기는 전남 신안군 기좌도(현 안좌도), 섬 출신이다. 육지가 그리워 목을 빼다 보니 키가 커졌다고 스스로 농을 하곤 했다. 그의 키는 거의 190cm였다. 지주 집안 자제로 중·고등학교 유학을 가야 했는데, 경성으로 가느니 차라리 일본이 더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목포를 거쳐 배만 타면 되었으니까. 긴조중학(錦城中學)을 졸업하고 귀국하자, 집안에서는 더 이상 공부를 하지 말고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김환기는 부친 몰래 수영을 해서 목포로 가는 배를 잡아타고, 밀항으로 일본에 다시 갔다. 그의 의지를 꺾지 못한 모친은 부친 몰래 일본으로 학비를 보냈다.
김환기는 1933년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 대학 ‘예술과’의 학제가 참신했다. 한 학부에서 문학, 철학, 미술사, 미술 실기 등을 함께 가르쳤던 것이다. 예술과 학감을 지낸 일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의 새로운 예술 교육이 희귀한 시도”라서 일본인조차 “수재라기보다 천재를 자부하는 활발한 청년들이 모였다”고 한다. 조선인 중에는 김환기 외에도 시인 김기림과 임화, 화가 구본웅과 박고석 등이 니혼대학 예술과 출신인데, 이들이 모두 문학과 미술에 함께 조예가 깊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원래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갔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깊었던 김환기가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그는 이후 한국의 문학계와 미술계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핵심, 요즘 말로 ‘핵인싸’가 된다.
김환기가 1950년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화상.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글·그림 모두 능통한 예술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글과 그림이 다 되는 김환기는 이미 1930년대부터 문예지에 화문(畵文)을 발표했다. “그림 김환기, 시 수화(樹話, 김환기의 호)” 이런 식으로. 그의 글은 그림과 마찬가지로 서정적인 것도 많지만, 흥미롭게도 몇몇 글은 그림과 정반대다. ‘건넛집 부부 싸움 하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하는 수 없이 길을 나섰다’는 내용의 글이 있으면, 같이 딸린 삽화는 거리로 나선 후 노점과 가로수의 모습을 평화롭게 담는 식이다. 글은 괴로운데, 그림은 서정적이다.
김환기 글 그림, 「무제」,『문예(文藝)』 1949.9.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1958년 10월 16일에 그린 작품의 화제(畵題)를 읽어보자. “시월달 깊은 밤에 깊은 밤 시월달에 괴롭고 또 괴롭고 오만가지 생각에/ 깊은 밤 시월달에 시월달 깊은 밤에 깊은 밤에 오만가지 생각에 괴롭고 또 괴롭고.” 이것은 시인가 노래인가 절규인가? 이때 김환기는 김향안과 함께 파리에 있고, 고국에는 어린 세 딸과 노모(老母)가 있었다. 10월이라 추석도 지났는데, 애들은 어찌 지내고 있는지. 장남이라 산소를 돌보는 것도 자신의 몫인데, 벌초는 누가 했는지. 타향에서 괴롭고 또 괴로운데, 그림은 소박한 제사라도 지내듯 과일을 올린 소반을 그려 놓았다. 그의 솔직한 심경을 담은 글, 특히 편지글은 대체로 그립고 괴로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에 비해 그림은 어찌 이리 서정적일까. 그에게서 그림은, 어쩌면 작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위안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김환기, <소반>, 1958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서정주, 조병화… 시인을 사랑한 화가
문학을 좋아하고 서정성이 넘쳤던 김환기가 시인을 사랑했던 것은 당연하다. 김광균, 서정주, 조병화, 김광섭 등 여러 시인과 가깝게 지냈다. 서정주의 시를 하도 좋아해서, 프랑스로 갈 때는 서정주 시를 불어로 번역해 시집을 내주겠노라고, 미국으로 갈 때는 영어로 번역해 주겠노라고 부도 수표를 날리곤 했다. 김환기 자신도 그럴 돈이 없으면서. 꼭 그림을 팔아 돈을 많이 벌 수나 있을 것처럼 말이다.
1955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참담한 현실 앞에서 서정주의 ‘기도’라는 시를 손수 적어 매화 만발한 그림과 함께 발표한 적도 있다. “저는 시방 꼭 텅 빈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텅 빈 들녘 같기도 하옵니다. 주(主)여. 한동안 더 모진 광풍(狂風)을 제 안에 두시든지 날으는 몇 마리의 나비를 두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자기와 같이 하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어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전쟁 후 폐허 속에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품한 작품이다. 모든 것이 텅 빈 시대였기에, 그림은 애써 풍성하다.
시인 조병화에게 선물한 그림 ‘가을'(1955).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부산 피란 시절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 그린 그림 ‘가을’은 김환기가 시인 조병화에게 선물한 작품이다. 환도를 자축하듯, 서울의 상징인 한강과 삼각산, 그리고 광화문을 담은 풍경화다. 정초에 아침 댓바람부터 김환기의 집에서 술을 먹던 조병화가 정오쯤 되니 더는 술이 들어가지 않아 가겠다고 하자, “이 방에서 그림 하나 가지고 가라”고 해서, 조병화가 직접 들고 온 작품이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김환기는 친구들에게 곧잘 주었다. 본인은 작품을 못 파는 게 아니라 안 파는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김환기의 성북동 아틀리에 사진, 1955. 조병화에게 선물한 <가을>이 이젤에 놓여 있고, 서정주의 시 ‘기도’가 들어간 작품 <항아리>가 제작 중에 있다.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가장 존경했던 시인 김광섭
여러 시인 중 김환기가 마음속 깊이 존경한 시인은 김광섭이었다. 김광섭은 1905년생으로 김환기보다 여덟 살 위인 한참 선배다. 와세다 대학 영문과 출신의 수재였는데, 일제강점기 중동학교 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반일 감정을 주입했다는 이유로 사상범으로 몰려 3년 8개월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지냈다. 해방 후 ‘자유문학’을 발행했고, 1961년 성북동으로 이사 간 후에 쓴 시 ‘성북동 비둘기’가 대중적으로 유명하다. 김환기와는 성북동 이웃사촌이었다가 김환기가 뉴욕에 건너가 정착한 이후로는 주로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뉴욕에서 점화를 그리고 있는 김환기.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1966년 뉴욕에서 김환기가 김광섭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이제는 김광섭에게 호화 시집을 내주겠노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원색 석판화를 넣어서 호화판 시집을 제가 다시 꾸며 보겠어요. 서울에 가지는 날, 그것도 딸라(달러)를 좀 쥐고 가지는 날, 자비 출판하겠어요. 한 권에 3만원짜리 시집을 내야겠어요. 되도록 비싸서 안 팔리는 책을 내고 싶어요. 이런 것이 미운 세상에 복수가 될까.”
1966년에 3만원짜리 시집이라니! 당연히 팔릴 리가 없다. 하지만 어차피 더 싸게 만들어도 안 팔릴 텐데, 이왕 아무도 안 알아주는 일을 할 바에야 마음껏 하고 싶은 멋진 일이나 하자는 생각! 그것이 이 시대 예술가의 오기이고 긍지이며, 김환기 식(式) ‘세상에 대한 복수’였던 셈이다.
김환기가 시인 김광섭에게 보낸 편지, 1966.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그러나 아직도 ‘딸라’가 손에 쥐어지지 않던 1970년 어느 날, 김환기는 김광섭이 죽었다는 비보를 뉴욕에서 접한다. 그는 너무나도 큰 실의에 빠져, 김마태(‘우주’를 소장했던 김환기의 후원자 겸 의사)의 집으로 가서,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메모하듯 드로잉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리고 점화 한 점을 그려 김광섭에게 헌정하듯,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을 붙였다. 밤하늘의 별처럼 검푸른 점들이 빼곡히 가득 찬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서울로 보내져 그해 한국일보 주최 한국미술대상을 받았다.
◇극심한 고통 속에 찍어 내려간 점화
반전이 있다. 실제로 김광섭은 1970년에 세상을 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환기가 접한 소식은 오보였다. 오히려 이 작품이 제작되고 4년이 지난 1974년, 김환기가 뉴욕에서 먼저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김광섭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77년, 오랜 투병 끝에 서울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환기의 제자이자 사위인 ‘한국 단색화의 선구자’ 윤형근(1928~2007)은 김환기의 죽음이 ‘과로’ 때문이라고 썼다. 김환기가 병원에서 죽기 15일 전 윤형근에게 보낸 마지막 엽서에는 “한 3년 견뎌왔는데, 결국은 병원에 들어와서 나흘째 된다”고 적혀 있다. 왜 한 3년을 견뎌서 그제야 병원에 간 걸까. 참으로 미련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왜 그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끝도 없이 점을 찍었을까. 하늘에 있는 별만큼이나 점을 찍을 수 있을 것처럼. 김환기가 일기에 쓴 대로, 그가 찍은 무수한 점은 “하늘 끝에 가 닿았을까.” 우리는 대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 이 글에 소개된 작품 중 일부는 5월 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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