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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한국 미술사

[살롱 드 경성] 소박해서 질리지 않는 조선백자처럼... 삶을 예술로 만든 夫婦 화가

by 주해 2022. 12. 13.

도자의 미학을 명품 유화로
화가 도상봉과 아내 나상윤

도상봉의 '라일락'(1975). /도윤희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중 1927년 제작한 여성 누드가 한 점 있다. 앉아 있는 여성의 평범한 나체를 담담하게 그린 작품이다. 일견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데, 바로 이 ‘지나친 평범함’이 묘하게도 눈길을 끈다. 아무런 표정을 담지 않은 여성 모델! 그녀의 신체는 조금도 이상화되지 않은 채 물렁물렁하고 처진 살덩이가 여과 없이 노출되어 있다.

이런 직설적 여성 누드는 결코 남성이 그릴 수 없는 영역이다. 같은 여성 화가만이 이처럼 전혀 각색되지 않은, 사실 그대로인 여성을 그릴 수 있다. 대체 이 시대 어떤 대담한 여성 화가가 이런 솔직한 누드를 그렸을까?

나상윤 '누드'(1927). /도윤희 제공

◇ 단식 투쟁으로 얻은 사랑

나상윤(1904~2011)은 화가 도상봉(1901~1977)의 아내다. 둘 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이다. 같은 동네 출신이니 양가 부모가 맺어준 결혼을 했으리라 지레짐작하기 쉽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들의 연애담은 진정 드라마틱했다. 도상봉이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그만두고, 부모 몰래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 때가 1923년이다. 그해 도상봉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 동네 사람을 모아놓고 연극 공연을 했는데, ‘장발장’ 역할을 맡아 열연하던 그는 객석 첫 줄에 앉아 있던 나상윤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이들은 바로 연애를 시작했는데, 당시 조선에서 연애는 ‘범죄’로 여기던 때였다. 양가 반대에 부딪힌 나상윤은 연애를 그만두리라 맘먹었지만, 단식투쟁을 해서 초췌한 몰골로 나타난 도상봉을 결국 받아들인다. 둘은 대담하게도 고향을 도망치듯 떠나,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상봉은 도쿄미술학교로 돌아갔고, 나상윤은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나상윤 '가면 있는 정물'(1927). /도윤희 제공

동경여자미술학교는 나혜석, 백남순 등 근대기 쟁쟁한 여성 화가들이 다녔던 여성 전문 미술 학교였다. 나상윤은 이 학교에서 성신여대 설립자인 이숙종과 함께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공부했다. 나상윤은 일본인 교수 오카다 사부로스케에게 ‘천재적’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타고난 소질을 인정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누드’는 그녀가 불과 23세에 그린 작품이다. 그 외 유화 3점과 데생 10여 점이 현재까지 전하는 나상윤의 일본 유학기 작품이다. 1920년대에 제작한 조선인 유화 작품은 남녀 화가를 통틀어 드문 데다가, 대담한 구성과 섬세한 색채 선택, 여성 화가 특유의 감각과 시선이 담겨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나상윤과 도상봉은 졸업 후 양가 승낙을 얻어 정식 결혼식을 올리고, 1931년 경성 명륜동에 신혼집 겸 아틀리에를 꾸렸다. 숭삼화실! 이곳에서 부부는 중고생에게 서양화를 가르쳤다. 도상봉은 보성고보 재학 시절 삼일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이력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 공적 활동에는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부는 그런 것을 별로 시련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타입이었다. 도상봉은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해서 총독부 통제를 상대적으로 덜 받은 ‘경신학교’에 미술 선생으로 나가면서 일제강점기를 통과했다.

1940년대 숭삼화실에서 도상봉(왼쪽)과 나상윤 부부. /도윤희 제공

◇ 조선백자 사랑의 ‘원조’

1930년대 도상봉은 도자기 수집가로 더 유명했다. 일본으로 좋은 도자기가 유출되는 것이 안타까워, 1933년에는 아예 직접 도자기 상회를 열었다. 그곳으로 도자기가 모이면, 좋은 것을 본인이 사들이기 위해서였다. 도상봉의 도자기 사랑은 극진해서 호를 ‘도천(陶泉)’, 즉 ‘도자기의 샘’이라고 지을 정도였다. 본인이 소장한 도자기 300점으로 ‘이조도자전’을 명치제과에서 열기까지 했다. 나중에 김환기가 도자기 수집에 빠졌을 때, 선배 화가 도상봉을 찾아가 늘 품평을 들은 일화는 유명하다. 김환기의 도자기 사랑보다 훨씬 앞서고 더욱 열정적이었던 것이 도상봉의 도자기 애호였다. 20세기 수많은 한국의 화가가 도자기, 특히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는데, 그 원조가 바로 도상봉인 셈이다.

도상봉이 수집한 조선시대 백자호. /도윤희 제공

그런 도상봉보다 도자기를 더 좋아한 이가 아내 나상윤이었다. 돈도 없는데 도자기를 사 오면 대부분의 아내는 잔소리를 하기 마련인데, 나상윤은 반대였다. 어떤 도자기를 더 구해오라고 조르는가 하면, 도자기 평가에서 관리까지 누구보다 전문적이고 철저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꾼들을 불러 좋은 도자기를 모두 싣게 해 고향 홍원의 한옥 마룻바닥 아래 숨겨둔 것도 나상윤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귀한 도자기 대부분이 북에 남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안타까운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 모든 그림이 도자기 같았다

도상봉 '정물'(1974).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작품이다. /도윤희 제공

전쟁 후에도 남한에 남은 일부 도자기가 도상봉 그림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그런데 “도상봉은 도자기를 즐겨 그렸다”고 말하기보다, “정물화, 풍경화를 포함한 도상봉의 모든 그림이 도자기 같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는 조선백자의 ‘소박하고 은은하면서 기품 있는 미학 자체’를 유화로 옮기는 일에 평생을 걸었기 때문이다.

조선백자의 흰색은 다 같은 흰색이 아니다. 푸른빛이 도는 흰색에서 노란빛이 도는 흰색이 다 다르고, 그런 색마저 아침저녁의 광선에 따라 풍부하게 다른 색감을 선사한다. 그뿐인가! 단순하고 듬직한 형태, 질박한 표면 질감, 오랜 시간이 지나 생겨난 자연스러운 균열…. 조선백자의 이 모든 요소가 도상봉의 표현대로라면 우리에게 “신비한 교훈과 기쁨”을 던져준다.

현재 고 이건희 기증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되고 있는 도상봉의 절정기 작품을 살펴보면, 도상봉이 조선백자에서 얻은 교훈을 어떻게 자신의 회화에 적용했는지 알 수 있다. 도상봉 작품의 캔버스 천은 한 올 한 올 셀 수 있을 만큼 매우 얇게 칠해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렇게 얕은 물감층으로 이다지도 풍부한 색상의 변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이 작품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매우 작은 붓으로 마치 안개와 같은 옅은 색채가 화면을 뒤덮은 다음, 조금씩 미묘하게 다른 색채를 하나하나 ‘점점이’ 올리면서 형태를 만들어가는 ‘신비로운’ 작업이다.

도상봉의 '코스모스'(1959). /도윤희 제공

바로 이런 작업 방식을 통해 그는 조선백자에서 본 것과 같은, 사물의 은은하면서도 풍부한 색감과 질감을 조심스레 화폭에 옮길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이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신비하고,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요란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묵직한 평범함! 소박하고 담백해서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 그것은 조선백자의 미학이자 도상봉의 작품이 추구한 지점이다.

도상봉이 그린 것은 대부분 그의 일상생활 가까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성균관이 내다보이는 창밖 풍경, 작업실 사방탁자에 놓인 조선백자, 거기에 꽂힌 계절마다 다른 꽃, 봄에는 개나리와 라일락, 가을에는 국화와 코스모스 같은 것 말이다. 너무나 소소하고 평범해서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바로 거기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이 언제나 깃들어 있다. 마치 조선백자처럼, 특별할 것 없어 보여도 자꾸 보면 정감 가고, 볼 때마다 다른 매력을 풍기는 것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어쩌면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조선백자가 던져주는 진정으로 “신비한 교훈”이 아닐지.

도상봉의 '안개꽃'(1974). /도윤희 제공

◇ 삶을 예술로 만든 여인

도상봉은 1960년대 초 환갑이 되었을 때 “이제 그림을 그릴 가장 좋은 나이가 되었다”고 선언한 후, 매일 아침 8시 반부터 오후 3시까지 작품 제작에 전념, 76세에 작고할 때까지 유화 1000여 점을 그렸다. 그의 작업실에는 오로지 나상윤만이 출입할 수 있었는데, 한 작품이 완성되면 도상봉은 반드시 나상윤을 불러 품평을 들었다. 그녀가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아직 뭔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때로 나상윤이 “작품이 아주 좋다”고 말하면, 도상봉은 날아갈 듯 기뻐하며 붓을 놓고 명동으로 놀러 나갔다.

나상윤은 1남 3녀를 기르고, 손자·손녀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107세까지 살았다. 그녀는 평생 “손을 쉬지 않았고”, 주변인을 위해 온갖 것을 직접 만들었는데, 우유갑을 활용한 엽서부터 빨간 내복을 리폼(reform)한 멋진 티셔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언제나 유쾌하고 유머를 잃지 않으며, ‘현재’에 충실한 낙천주의자이자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이들과 한집에서 자란 손녀 도윤희(60)는 훌륭한 화가로 성장해서, 할머니 나상윤을 이렇게 회고했다. “할머니는 재능이 엄청난데도 예술가를 내조하는 일로 평생을 살았지만, 그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작품을 제작하는 것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지는 않았지만,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험해도, 당당하고 행복하게 삶을 영위했던 이들이 있다. 이 부부가 그랬다. 한국 근대 화가 이야기는 대부분 비극적인데, 이 부부처럼 소소하고 아름다운 인생 이야기가 하나쯤 있는 것도 기쁘지 아니한가. 사실 ‘평범한 행복’을 유지하는 삶이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이란, 진정한 용기와 마음의 자유를 지닐 때만 쟁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의 영역이 아닌가.

도상봉의 '광릉 풍경'(1973). /도윤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