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인연, 화가 이강소·권순철 한옥집 개조한 전시장서 2인展 전위미술과 리얼리즘 장르 공존 “동고동락하던 옛 화실 떠올라”
좁은 전시장에 두 거장이 나란히 섰다. 이강소(왼쪽)가 “착한 양반에게 내가 술을 가르쳐 건강을 망쳤다”고 말하자, 권순철은 “예술하는 자세는 형님에게 배웠다”며 웃었다. /박상훈 기자
좁은 집이 그들을 키웠다.
이것이 한국 미술계 거장, 화가 이강소(79)·권순철(78)씨가 서울 창성동의 20평 남짓한 낡은 한옥집에서 2인전을 열고 있는 이유다. 이곳은 두 사람이 1963년 비슷한 규모의 인근 누하동 화실에서 시사만화가 오룡 등과 서로 부대끼고 동고동락하며 숱하게 오갔던 동네. 전시를 먼저 제안한 이씨는 “통인동에서도 잠시 살았고 아직도 이곳에 들어서면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둘은 대구 경북고·서울대 회화과 선후배 사이로, 60년 넘는 인연이지만 2인전은 처음이다.
전시장은 이름하여 ‘창성동 실험실’이다. 한옥 서까래가 드러나고 골동에 가까운 옛 가구가 그대로 놓여있다. 지난해 권순철이 여기서 개인전을 열었고, 이강소가 들렀다가 한눈에 반했다. 다시 60년 전 그 좁은 화실을 떠올렸다. “공간이 좁으니 친밀함이 더 강해진다”며 “실험실이라는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권순철은 “대학 합격자 발표 날 같이 방(榜) 보러 갔다가 곧장 화실로 가서는 막걸리 사 먹던 생각이 난다”며 웃었다.
이강소가 해외를 여행하며 찍은 골목 사진 '몽유' /ⓒ이강소
권순철 2022년작 그림 '넋'. /ⓒ권순철
1세대 전위미술 작가 이강소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찍은 흑백의 골목 사진(‘몽유’)을 크게 인화해 전시장 절반을 몽환의 장소로 꾸미고, 이중섭미술상 수상자이자 한국인의 원형 탐구에 평생 천착해 온 권순철은 리얼리즘적 그림(‘넋’)으로 나머지 절반을 채워 현실과 비현실을 부려놨다. 전시 직전 이강소는 권순철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권 선생의 그림을 보면 이 세상에 대한 염려가 느껴집니다.” 그러자 며칠 뒤 답장이 왔다. “사전을 찾아보니 염려의 여러 뜻 중에 아름다움[艶麗]이 있더군요. 그 염려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좁은 집에서 실험은 계속된다. 1974년 ‘한국실험작가전’ 등에 참여하며 일찌감치 미술 실험에 뛰어든 이강소는 “우리 안에서 자생한 현대적인 사고로 미술 형식이 형성돼야 한다고 평생 생각해왔다”며 “작가에게는 이념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열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1972년 이강소와 함께 ‘신체제’ 그룹전에도 참여했던 권순철은 “우리 다음 젊은 작가들이 이 공간을 새로 해석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초기작과 함께 최신작 ‘넋’(2022)도 함께 걸려있다. 어떤 원색의 영혼이 무아지경으로 춤추는 듯 보인다.
이 전시장 주인은 가수 CL의 부친으로 유명한 서강대 물리학과 이기진(62) 교수다. 대학 시절 권순철에게 그림 수업을 들었던 인연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옛 화실은 중국집(‘영화루’)으로 바뀌는 등 동네 풍경은 격세지감이나, 이 한옥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이들의 실험실은 29일까지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