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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국 명예혁명] [하] 재정 주도권 쥐고권력 견제한 의회....왕이 돈 함부로 쓰자… 의회는 1파운드까지 꼼꼼히 검증했다

by 주해 2022. 12. 11.

2021-07-27 08:10:34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1/07/27/5QUX34DG75AX5AOFOU752B27AQ/

 

왕이 돈 함부로 쓰자… 의회는 1파운드까지 꼼꼼히 검증했다

왕이 돈 함부로 쓰자 의회는 1파운드까지 꼼꼼히 검증했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6 17세기 영국 명예혁명 하 재정 주도권 쥐고권력 견제한 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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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국 명예혁명] [하] 재정 주도권 쥐고권력 견제한 의회

명예혁명으로 영국 왕이 된 윌리엄은 곧 유럽 각국이 합종연횡해 싸웠던 ‘9년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의회가 국가 재정을 장악한 영국 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혁신적인 해결책을 도입했다. 조세 저항을 피하기 위해 상품과 서비스에 부과하는 간접세를 늘리면서, 동시에 매년 확정 이자를 지급하는 영구채(永久債·consol)를 발행한 것이다. 국민은 무거운 세금을 내기만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던 시대, 영원히 나라에서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국채는 매력적이었다. 영란은행에 투자 배당금을 받으러 온 각계각층 사람들의 떠들썩한 모습을 묘사한 조지 엘가 힉스의 그림.(부분) 런던 영란은행 박물관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1688~1689년 영국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제적인 국왕을 몰아낸 소위 명예혁명에 성공했다. 새 국왕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의회와 협력하며 통치한다는 원칙에 동의했다. 그 약속을 실현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무엇일까? 국왕의 ‘돈줄’을 통제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영국 의회는 잘 알고 있었다.

근대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재정 문제는 핵심 사안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고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국가의 흥망에 직결되는 문제다. 효율적이고도 공평하게 재정 문제를 해결하면 국내 안정을 찾고 국제 경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러지 못할 경우 반란이나 심지어 혁명 상황에 직면한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혁명으로 무너지고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사태는 세금 문제 해결에 실패한 데에서 시작했다. 부유한 귀족은 면세 특권을 누리는 반면 무거운 조세 부담을 지고 있던 농민들이나 상공업자에게 계속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강요하니 극심한 조세 저항에 직면한 것이다. 이런 불편을 피하는 방편 중 하나가 징세청부제다. 원래 정부가 거두어야 할 조세를 돈 많고 사업 재간이 있는 개인이 먼저 정부에 선납(先納)한 후 훨씬 많은 돈을 걷는 식이다. 당연히 비효율적이고 불공평한 수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무능력한 정부가 애용하는 또 다른 방법은 부유한 개인에게 자금을 빌리는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여 거액의 급전이 필요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업가들에게 높은 이자와 각종 특혜를 약속하고 자금을 조달한다. 대개는 거액을 빌렸다가 상환이 힘들면 다시 또 돈을 빌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부채 액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악순환에 빠지곤 한다. 결국 돈을 빌려준 대상인들이 파산을 면치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런 암담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드디어 영국이 해결책을 찾았다. 그 핵심은 의회가 재정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를 ‘재정혁명’이라고 부른다.

의회가 왕권을 제한하도록 한 권리장전에 서명해 영국이 거대한 제국으로 가는 주춧돌을 놓은 윌리엄 3세 왕의 초상. 스코틀랜드 초상화가 토머스 머리의 1691년 작. /위키피디아

명예혁명으로 잉글랜드 국왕이 된 윌리엄은 곧바로 장기간의 전쟁(1688~1697, 영국사에서는 ‘9년 전쟁’이라고 부른다)에 직면했다. 9만명의 육군과 4만명의 해군을 동원하고 동맹국 지원까지 해야 하니 엄청난 거액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의회는 국왕에게 가급적 적은 자금을 주고 아주 꼼꼼하게 통제를 가하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가장 효율적인 재정 제도를 만들어내야 했다.

전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금 징수의 확대다. 재산세와 소득세를 크게 올렸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저항이 심할 수밖에 없으니 온갖 상품과 서비스 소비에 간접세를 부과하였다. 마차⋅소금⋅맥주⋅포도주⋅브랜디⋅담배⋅차⋅커피 등의 소비품은 말할 것도 없고 출산⋅매장⋅결혼에까지 각종 세금을 물렸다. 지난날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하며 프랑스 국민이 훨씬 많은 세금에 시달렸으리라고 예단했다. 그렇지만 실제 연구 결과를 보면 영국 국민이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있었다. 과도한 조세 저항을 요령껏 잘 피했을 뿐이다. 하여튼 재정 문제 해결 방안으로 역진세 성격이 강한 소비세를 크게 늘린 것은 결코 긍정적인 방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혁신적인 해결책은 영구채(永久債·consol)라는 새로운 개념의 차입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가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자금을 일반 시민들에게 빌리는 것, 즉 국채 발행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방식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이 국채에 상환 기한이 따로 없고 이자만 영구히 지불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정부가 돈을 빌리기는 하되 그것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다만 매년 이자를 확실하게 갚기만 하면 되고, 그러기 위해 이자 지급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맥주세 같은 확실한 세입원을 이자 지불용으로 정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 보자. 정부가 연 3% 이자로 국채 1조원을 발행했다고 하자. 정부는 1조원을 갚을 필요는 없고 단지 세수입 중 매년 300억원을 확보하여 채권 소지자들에게 지불하면 된다. 정부에 돈을 빌려준 사람, 즉 채권 구입자로서는 이론상 자손 대대로 투자금의 3% 과실을 누리게 되니 약속대로 이자 지불이 잘 지켜진다면 좋은 투자인 셈이다. 만일 빌려준 돈을 되찾고자 하는 경우 정부에서 상환받는 것이 아니라 채권 시장에서 매각하면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국가는 원하는 액수를 빌리되 그것을 갚을 필요가 없고, 국가에 돈을 빌려준 사람은 이자소득을 누리다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돌려받는 신기한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다만 정부는 채권 액수가 점점 커져서 이자 부담이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사태는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재정 여건이 호전되었을 때, 예컨대 전쟁이 끝나서 재정 여력이 생겼을 때, 정부 스스로 채권 시장에 들어가 이전에 발행한 채권을 구입하여 소각하면서 전체 액수를 관리한다.

사실 이 아이디어 자체를 영국에서 창안한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제도가 실제로 운영되도록 실천한 것이다. 이 제도는 신용을 잃는 순간 끝장난다. 정부가 이자 지불을 못 하게 되는 게 대표적이다. 만일 국왕에게 이 제도의 운영을 맡길 경우 걸핏하면 거액의 국채를 발행할 것이고, 그러면 결국은 채권 총액이 너무 커져서 언젠가 이자 지불을 못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의회가 철저히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윌리엄공의 군대를 피해 도망치면서 국새를 템스강에 버리는 제임스 2세를 묘사한 1690년 무렵의 판화. /게티이미지코리아

의회의 재정 통제는 명예혁명 이전부터 서서히 발전해 왔다. 1670년대부터 국고 지출을 특정한 목적으로 한정한다는 세출 규정(appropriation) 그리고 과연 실제로 그렇게 집행되었는지 따지는 감사(audit)가 자리 잡았다. 의회는 국왕과 정부가 원하는 대로 세금이나 차입을 허락하는 게 아니라 어떤 용도에 돈을 쓰려고 하는 건지 따져본 다음 합당하다고 판단할 때에만 승인했고, 또 정말 원래 계획대로 집행했는지 꼼꼼히 점검했다. 이런 식으로 국가 재정 운용에 대한 국민의 신용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국가의 공신력이 한번 무너지면 제도는 쉽게 망가지고 만다.

모든 정부는 가급적 많은 예산을 확보해서 쓰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후대에 어떤 부담을 지울지 고려하지 않고 방만하게 예산을 풀어 쓰면 반드시 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국가의 돈 문제를 민주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해결한 것이 영국이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원금 안갚고 이자 안주고… 엉망이었던 英 재정관리, 명예혁명 이후에야 개선]

어느 국가의 재정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는 척도 중 하나는 전비(戰費)의 해외 송금 방식이다. 거액의 돈을 적시에 외국에 보낸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점에서 명예혁명 이전 시대 잉글랜드의 수준은 다른 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는 저급한 수준이었다. ‘팔라비치노(Pallavicino) 사례’가 그 점을 말해 준다. 1570년대에 잉글랜드는 에스파냐와 전쟁 중인 동맹국 네덜란드에 자금 원조를 해주어야 했다. 이때 이탈리아 상인 팔라비치노가 송금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이런 식이다. 팔라비치노가 1만5000플로린어치의 명반(직물업에 필요한 소재)을 네덜란드 의회에 공급한다. 네덜란드 의회는 이 명반을 판매한 대금을 얻고 그 액수만큼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차입금 계정에 기록한다. 여왕은 1만5000플로린과 연 10%의 이자를 팔라비치노에게 지불한다. 그러나 약속했던 원금 지불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자도 어떤 해에는 지불하고 어떤 해에는 지불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가서, 1598년에는 원리금 합계가 8만8901플로린이 되었다. 팔라비치노는 이 액수를 다 받지 못한 채 1600년에 사망했지만, 사실 그동안 7만 플로린을 받았으므로 450%의 이익(48년 동안 연 9%)을 얻은 셈이다. 이런 저조한 재정·금융 기술 수준은 명예혁명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