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2 14:24:36
작품설명
금강산의 광활한 전경이 화폭에 펼쳐졌다. 장장 3m에 달하는 이 작품은 도암 신학권이 그려낸 <금강내산총도>로 우측의 우두봉牛頭峯을 시작으로 명경대明鏡臺, 묘길상妙吉祥, 보덕굴普德窟, 만폭동 萬瀑洞을 지나 좌측 끝에 정심대淨心臺에 이르러 끝을 맺으며, 해당 고적들의 지명이 상세히 적혀 있다. 우뚝 솟은 무수한 봉우리와 쏟아지는 물줄기, 굽이치는 언덕 사이사이 자리한 내금강의 명소들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이곳을 유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도암 신학권은 19세기에 활동했던 문인화가이다. 당시 금강산은 진경산수의 주요 소재로 다뤄지며 많은 화가들이 화폭에 그 절경을 담아내고자했다. 특히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는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도암은 겸재의 그림을 모사함으로써 그의 화풍을 계승, 확장시켜갔다. 현전하는 몇 안 되는 그의 작품 대부분이 금강산을 그린 것인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금강내산총도>, 조던 슈니처박물관소장 <금강내산총도>1856, 서울옥션 159회 출품작 <금강내산총도>1851 모두 출품작과 같이 2-3m에 달하는 병풍 형태의 금강전도라는 점이다.
또한 이 네 작품은 각각 다른 연대에 그려졌지만 쓰인 발문이 약간씩 다를 뿐 거의 동일한 내용이라는 점도 주목해 볼 만하다.그는 모든 발문에서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독보적이라 치켜세우고 있는데, 출품작을 제외한 나머지 세 작품에는 ‘그림이 너무 오래되고 그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염려해 새 종이에 이를 모방했다惜其年久漫漶 終歸於澌盡 故乃以新紙摹之 揮灑已畢 釋觚環視’고 적어 두어 이 또한 같은 맥락 아래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도암은 금강산에 가본 적이 없었기에 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고 모사하고 재해석하면서 이곳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왜 다수의 병풍 형식의 금강산도를 그리면서 동일한 발문을 적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금강산에 대한 동경, 겸재에 대한 경외심, 그의필력을 조금이나마 쫓고 싶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상시기키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한다.출품작은 전하는 <금강내산총도> 중에서도 그 상태가 온전하며, 신학권의 나이 칠순이 되는 갑인년閼蜂攝提格, 1854에 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암노포陶巖老圃’ 서명과 ‘도암陶巖’의 백문방인을 찍어 본인의 진작임을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
김영수, 「19세기 金剛山圖 硏究」,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