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미술/한국 고미술

도암 신학권(申學權 : 1785~1866) :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摠圖)Landscape of Mt.Geumgang : ink and color on paper 298.4☓58.3cm : 1854

by 주해 2022. 12. 16.

2022-02-12 14:24:36

 

작품설명

금강산의 광활한 전경이 화폭에 펼쳐졌다. 장장 3m에 달하는 이 작품은 도암 신학권이 그려낸 <금강내산총도>로 우측의 우두봉牛頭峯을 시작으로 명경대明鏡臺, 묘길상妙吉祥, 보덕굴普德窟, 만폭동 萬瀑洞을 지나 좌측 끝에 정심대淨心臺에 이르러 끝을 맺으며, 해당 고적들의 지명이 상세히 적혀 있다. 우뚝 솟은 무수한 봉우리와 쏟아지는 물줄기, 굽이치는 언덕 사이사이 자리한 내금강의 명소들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이곳을 유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도암 신학권은 19세기에 활동했던 문인화가이다. 당시 금강산은 진경산수의 주요 소재로 다뤄지며 많은 화가들이 화폭에 그 절경을 담아내고자했다. 특히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는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도암은 겸재의 그림을 모사함으로써 그의 화풍을 계승, 확장시켜갔다. 현전하는 몇 안 되는 그의 작품 대부분이 금강산을 그린 것인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금강내산총도>, 조던 슈니처박물관소장 <금강내산총도>1856, 서울옥션 159회 출품작 <금강내산총도>1851 모두 출품작과 같이 2-3m에 달하는 병풍 형태의 금강전도라는 점이다.

 

또한 이 네 작품은 각각 다른 연대에 그려졌지만 쓰인 발문이 약간씩 다를 뿐 거의 동일한 내용이라는 점도 주목해 볼 만하다.그는 모든 발문에서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독보적이라 치켜세우고 있는데, 출품작을 제외한 나머지 세 작품에는 ‘그림이 너무 오래되고 그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염려해 새 종이에 이를 모방했다惜其年久漫漶 終歸於澌盡 故乃以新紙摹之 揮灑已畢 釋觚環視’고 적어 두어 이 또한 같은 맥락 아래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도암은 금강산에 가본 적이 없었기에 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고 모사하고 재해석하면서 이곳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왜 다수의 병풍 형식의 금강산도를 그리면서 동일한 발문을 적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금강산에 대한 동경, 겸재에 대한 경외심, 그의필력을 조금이나마 쫓고 싶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상시기키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한다.출품작은 전하는 <금강내산총도> 중에서도 그 상태가 온전하며, 신학권의 나이 칠순이 되는 갑인년閼蜂攝提格, 1854에 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암노포陶巖老圃’ 서명과 ‘도암陶巖’의 백문방인을 찍어 본인의 진작임을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

김영수, 「19세기 金剛山圖 硏究」,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6.

 

金剛內山摠圖 兼序華人詩曰“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余以東人里居六七百, 年至四五十, 尙未得見. 盖以將老不能閱月遠離故也. 旣未得足攝眞境, 常欲想見彷彿於畵中之境, 而諸帖各異, 未知其同不同. 抑亦坡詩所云“橫看成嶺側成峯, 到處看山各異容.”者耶? 唯謙齋鄭元伯所寫, 爲諸家最, 散在人家. 其運筆於雲嵐扶輿之中, 而的得佳境, 遠近向背, 瞭然在目. 余愛而不能捨, 始知其我東竗手獨步於衆中者也. 其矗矗奇奇, 疑鬼疑人, 奪目怳惚, 有若變幻於俄頃之間. 畵亦然矣, 況其眞乎! 無乃化翁之有意用力於瀜結之初, 而現出琉璃千萬諸佛於滄渤之東, 而飛仙之所窟宅, 靈物之所藏晦者耶? 然則其天慳地秘神剜鬼刻之妙, 雖巧於摸寫者, 豈得形容於萬一也哉! 又玆山或名楓嶽, 前人所詠“五夜虛明長欲曙, 四時寥落易爲秋.”是也. 然此帖攬取時景, 乃在春夏之交蒼翠如滴者, 何也? 凡游閒之士, 陟遐冥搜者, 多在日長少年之時也. 觀是帖者, 當作此看.

 

금강내산총도-서문을 겸하여-중국인의 시에서 “고려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 번 봤으면!”이라고 했는데 나는 동국 사람으로서 금강산으로부터 6~7백리 거리에 살고 나이가 4~5십이 됐지만 아직까지 구경하지 못한 것은 노년을 앞두고 한 달 넘게 먼 길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풍광을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언제나 그림 속 풍경에서나마 그 비슷한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첩들마다 각기 달라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동파의 시에서 말한 “가로로 보면 산등성이고 세로로 보면 산봉우리이니, 처한 위치마다 산의 모습이 다른 것이다.”는 것일까.그런데 오직 겸재 정원백(鄭元伯, 정선)이 그린 것은 여러 화가들 중에 최고로 여기저기 소장돼있다. 서기가 모인 곳에서 운필하며 훌륭한 풍광을 알맞게 캐치해 원근과 향배가 눈 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사랑한 나머지 차마 손에서 뗄 수 없는 나는 비로소 우리 동방의 오묘한 솜씨로, 묻 사람들 가운데 독보자임을 알게 됐다. 첩첩의 기기묘묘함은 귀신인 듯 사람인 듯 사람의 눈을 황올로 내몰아 잠깐 사이에 수많은 변한이 있는 듯 하다. 그림도 그러할진데 실제 모습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이곳이 바로 자연을 주관하는 조화옹(造化翁, 조물주)이 세상을 처음 만들 때 창발(滄潑) 동쪽에 유리 같은 수많은 불상을 만들어내며 비선(飛仙)이 머물고 영물이 숨어있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기고 귀신이 깎고 다듬은 오묘함은 아무리 모사에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어떻게 만분의 일이나마 드러낼 수 있겠는가.또 이 산을 풍악이라고도 하니 옛사람이 읊은 “오경의 긴긴 밤 새벽이 오려 하고, 사계절 고요에 잠길 때 가을 찾아온다.”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첩이 포착한 풍광이 봄과 여름 사이 푸른 빛이 뚝뚝 떨어질 때로 한 한 것은 왜일까? 무릇 한가롭게 길 나서는 이들이 먼 곳 외진 곳을 찾아 나선 것이 대부분 소년 시절임을 볼 때, 이 첩을 감상하는 이들도 마땅히 이런 시각에서 봐야 한다.

 

東海謂之滄海渤海, 滄是沆漾之名, 而渤是洶湧之意也. 子厚云楚之南多石, 石之爲怪, 濱海尤甚. 自金剛立立叢叢, 如劍戟揷天, 旂幟干雲, 是知天一生水, 盪瀁淘磨, 存其筋骨, 至於叢石海金剛極矣. 造化亭毒之妙, 何其奇哉異哉!閼逢攝提格 仲呂月日 七旬翁題于陶巖老圃

 

동해를 창해(滄海), 발해(渤海)라 하는데, 창(滄)은 물결이 넘실댄다는 말이고 발(潑)은 물결이 일렁인다는 뜻이다. 유자후(柳子厚, 유종원)가 이르기를, “초나라 남쪽에 바위가 많은데 기괴한 바위는 바닷가에 더욱 많다.”고 했다. 금강산 쪽 우뚝 솟은 바위들은 마치 칼과 창이 하늘 위로 솟고 깃발이 구름에 닿은 듯 하니, 이는 하늘이 첫번째로 물을 만들어 그 세찬 파도로 갈고 닦아 뼈대만 남긴 것인데, 해금강 총석에 이르러선 극치에 이른 것이다. 조화의 사물을 만들어낸 오묘함이 얼마나 기묘하고 기이한가!갑인년 중려(仲呂, 4월)에 칠순옹이 도암노포(陶巖老圃)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