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2
딸까지 팔아먹는 ‘刺身鬼’, ‘모루히네 조선’의 비극
1920년대 모르핀 중독자 급증, 총독부 느슨한 규제에 일부 의사까지 모르핀 밀매로 폭리
아편, 모르핀 원료인 양귀비 열매를 품에 안고 가는 조선 소녀들. 양귀비 재배자의 자식들로 보인다. / '조선의 전매'(1941)중
‘학명은 ‘모루히네 환자’, 별명은 ‘자신귀’, 직함은 ‘하이카라 거-지’, 속칭 ‘아편쟁이’는….’
조선일보 1933년6월30일자는 ‘자신귀’(刺身鬼)를 소개했다. 자기 몸을 찌르는 귀신, ‘모르핀’ 중독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1920년대~1930년대 신문을 들춰보면 ‘자신귀’란 단어가 수시로 등장한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익숙한 용어였다.
100년 전 이 땅에는 모르핀 중독자가 넘쳐났다. 모르핀 주사에 인이 박힌 이들은 주사약을 구하기 위해 딸도, 아내도 팔아넘겼다. 1933년 2월 ‘자신귀’ 부녀의 상봉기사는 그 중 하나다.
양귀비 꽃을 재배하는 조선의 여성/'조선의 전매'(1941)중
◇'자신귀 부녀’의 상봉
평북 용천에 살던 스물아홉살 김시병은 3년 전 식구들을 이끌고 만주에 이주했다가 생활고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열두살짜리 딸 연울은 대련, 심양 등지로 방랑하다가 ‘모루히네’ 중독자가 됐다. 유랑하던 연울은 1933년 1월 중국 안동현(縣)에서 극적으로 아버지와 만났다.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역시 ‘모루히네’ 중독자였던 김시병이 주사값 70원 때문에 딸을 차련관의 음식점에 팔아넘겼다. 주사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딸은 음식점 고용살이를 견딜 수없어 도망쳤다. 음식점 주인이 주재소에 신고하면서 ‘자신귀 부녀’ 얘기가 세상에 알려졌다.(’12세 소녀로 ‘모히’중독될때까지: 일가 이산코 유랑3년에 자신귀된 부녀가 상봉’(조선일보 1933년2월8일자)
모르핀 중독자 부녀의 기막힌 사연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3년2월8일자
◇걸레쪽 입은 산송장들이 ‘눈깔사탕’연회
1927년 봄이었다. 경성 한복판 서소문의 ‘자신귀굴’(刺身鬼窟)을 르포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당시 아편 중독자는 10만을 헤아렸다고 한다. 기자는 당국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썼다.’아편쟁이가 전국에 10만이나 된다 하는 것은 개산에 불과하며 기실에 이르러서는 20만이 될는지 30만이 될는지 알 수없다고 하는 것은 어떤 당국자의 말이다.’
그중에서 아편쟁이가 가장 많은 곳은 경성이었다. 경기도평의회 평의원 조사를 빌려, 경성 시내 아편쟁이만 4만 이상이라고 했다. 경성에서도 가장 큰 아편굴이 서소문에 있었다. ‘지붕은 이즈러지고 서까래는 나팔을 부는 움막살이 초가집이 40여호가 즐비하게 늘어서고 걸레쪽 입은 산 송장의 무리들이 이곳저곳에 몰려앉아 ‘눈깔사탕’ 연회가 벌어졌다.’ 이곳에 몇 명이 사는지 통계는 없지만, 동네 사람 말을 빌려 40여호, 300여명이라고 전했다.(이상 ‘자신귀굴 방문기2-호수로 사십여호, 인수로 삼백’, 조선일보 1927년3월12일)
앳된 얼굴의 소녀가 양귀비 재배를 돕고 있다. /'조선의 전매'(1941) 중
◇대학 출신 인텔리, 명창 기생도 아편굴 신세
‘이 아편굴에도 위생 당국 조사에 따르면, 대학 출신과 중학 출신인 상당한 지식계급이 10여명에 달한다 하며 명기와 명창이란 이름을 듣던 기생과 광대도 수십명에 달한다는데, 때로 궂은 비가 내린다든지 달 밝은 밤에는 자기들의 심회를 토해내는 구슬픈 노래소리가 부근 동리 사람들까지 비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자신귀굴 방문기 4′, 조선일보 1927년3월14일)
인텔리, 명문대가 자제, 기생, 광대들이 모르핀에 빠져들어 부랑자 신세가 됐다. ‘귀족 자제’로 알려진 한 중독자는 ‘죽어도 우리 집 이야기는 말할 수 없습니다’고 했다. 그는 아내까지 아편을 맞게 해 내외가 집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나는 이곳에 있고, 아내는 전라도 모처에 있습니다. 들으시면 기막히시지요. 더 묻지 마시오.’ (‘자신귀굴 방문기’5, 조선일보 1927년3월16일)
◇모르핀으로 독감치료?
아편과 모르핀은 일제시대 조선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특히 아편을 정제한 모르핀은 아편연(阿片煙)에 비해 값이 싸고 사용하기가 간편한데다 당국의 규제까지 느슨했다. ‘모루히네’중독자가 급증한 이유였다. 모르핀 중독은 병원을 통해서도 버젓이 유행했다.
유행성독감이나 복통 같은 질병을 치료한다면서 모르핀 주사를 놓아주는 일이 빈번했다. 1921년 3월 진도에선 유행성 독감이 유행했다. ‘영양불량으로 인하야 어떤 사람은 폐병까지 병발되어 노약자는 사망한 자가 적지않은데, 그 관내 조선 의생의 말을 듣고 ‘모루희네’ 주사를 실시하여 도리어 위독에 빠지게 한 일도 많이 있었는지라.’(‘진도군의 감모창궐’, 조선일보 1921년4월13일)
◇고물상주인이 모르핀 주사 처방
모르핀을 만병통치약으로 믿고 남용하다 죽는 사고도 빈발했다. 의료인도 아닌 고물상 업자가 병을 고쳐준다며 모르핀 주사를 놓았다가 용량과다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고물상하는 김성오(45)와 주소 부정 김규성(40) 등 2명은 26일 오후1시 길야정 일정목 76번지 천단상회의 고용인으로 있는 갈경태(19)가 각기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모루히네 주사를 하면 나을 터이니 돈 50전을 내라고 하야 50전을 받고 모루히네 주사를 하여주었던 바 분량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갈경태는 그 자리에서 혼도함으로 즉시 부근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하던 중 동 4시에 죽었음으로 전기 두명은 모두 과실치사죄로 본정서에서 인치 취조중이라더라’(’’손방’의 모히주사로 생사람이 급사’, 조선일보 1928년11월28일) 이런 기사는 일제시대 신문에 넘쳤다.
◇의사들까지 모르핀 밀매로 폭리
모르핀 밀매로 돈벌이에 나선 일부 몰지각한 의사도 있었다. ‘천안에는 모루히네 중독자가 날로 늘어감에 유지자측에선 그 박멸책을 강구하고 경찰당국에서도 주의를 엄밀히 하던 바, 수일전에 어떤 사람의 밀고로 그 원인이 발각되어 경찰서에서 시내 대성의원에 있는 최종순의 가택수색을 위시하야 그 병원 의사 박충모와 중독자들을 소환 취조한 결과 전기 의사 박충모가 모루히네를 다량으로 밀매한 것이 판명되어 벌금 200여원에 처했다는데, 시내 사회 각방면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신성한 의업계에 도리어 사욕을 위하야 이같이 사회에 해독을 주는 의사는 엄중히 징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분개하야 장차 성토 배척할 기세가 날로 높아간다더라’(‘의사가 모히밀매하고 벌금 2백원 물어’,조선일보 1926년12월5일)
◇모르핀 밀매 벌금, 고작 200원
‘전라남도 지방에 모루히네 중독자가 날로 많아지는 원인은 자기 동족이 멸망함에 따라서 자기 몸까지도 결국 멸망되고 말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목전의 이익을 취하기에 눈이 붉어 간악한 수단을 가지고 모루히네를 밀매하기로 전업을 삼는 의사와 의생이 각 고을에 많이 생기는 것과 지방 경찰 당국자의 이에 대한 취체가 다만 표면에 지나지 못하는 까닭임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오’(‘모히밀매의생’, 동아일보 1922년 7월26일)
처벌은 느슨했다. 모르핀을 밀매한 의사에게 내린 처벌은 벌금 200원뿐이었다.
◇모르핀 중독 심각했던 1920년대
동아시아 아편문제를 연구한 박강 부산외대 교수는 1920년대~1930년대 조선의 모르핀 중독자 급증은 총독부의 안이한 대응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1914년 공포한 조선경무총감부 훈령에 따르면, 아편은 무겁게 처벌했지만, 모르핀 처벌은 가벼웠다. 아편연의 수입과 제조, 판매, 혹은 판매를 목적으로 소지한 자는 6개월 이상~7년 이하 징역에 처하고, 아편연을 피운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했다. 하지만 모르핀을 투여한 자는 3개월 이하 금고 또는 500원 이하의 벌금에 규정했을 뿐, 모르핀 주사자에 대해서는 처벌 규정이 없었다. 모르핀 밀매로 돈을 벌어도 처벌할 규정이 마땅찮았고, 모르핀중독으로 패가망신해도 개인적 일탈로 방관할 뿐이었다.
1919년 조선에서 모르핀을 독점 생산하던 다이쇼 제약 주식회사가 1차 대전이 끝나면서 수출이 어려워지자 이들이 생산한 모르핀이 조선 땅에 대거 풀렸다. 일본 내지에서 과잉 생산된 모르핀까지 조선으로 밀수입됐다. 모루히네 중독자가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총독부는 마약문제를 방관하다가 문제가 심각해지자 1930년 마약전매제를 시행했고, 1935년 ‘조선마약취제령’을 공포, 단속을 엄격하게 하면서 마약 중독 문제가 서서히 완화됐다.
◇'마약김밥’ ‘마약떡볶이’는 그만!
검찰총장이 집에서 마약을 소셜미디어로 피자 한 판값에 직접 구매하는 세상이 됐다고 한탄할 만큼, 최근 마약이 급속히 번지고 있다. 어린이 놀이터나 캠핑장에서 마약을 거래하거나 투약한 채 돌아다니다 붙잡히는 일이 심심찮게 보도된다. 올들어 7월까지 적발된 마약사범만 1만 명이 넘는다. ‘마약 김밥’, ‘마약 떡볶이’처럼 무심코 쓰는 말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마약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호기심만 자극할 뿐이다. 무엇보다 ‘자신귀’가 출몰하던 100년전 세상으로 돌아갈까 무섭다.
◇참고자료
박강, 아편과 조선, 선인, 2022
조선총독부 전매국, 조선의 전매, 1941
◇다음 링크(https://chosun.app.link/kichul)를 스마트폰에서 클릭하고 ‘조선일보 앱’을 설치하면, ‘모던 경성’에 나오는 100년 전 조선일보 기사 원문과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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