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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대통령이 조선 도공들 묻힌 산 향해 절할 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나이 마흔에 가업 이은15대 심수관을 만나다

by 주해 2022. 12. 28.

2022.10.22

 

 “盧대통령이 조선 도공들 묻힌 산 향해 절할 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盧대통령이 조선 도공들 묻힌 산 향해 절할 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盧대통령이 조선 도공들 묻힌 산 향해 절할 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무튼, 주말 나이 마흔에 가업 이은 15대 심수관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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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에 가업 이은
15대 심수관을 만나다

서울공예박물관에서 만난 15대 심수관이 조선시대 백자청화파초국화문 항아리 앞에 서 있다. 그는 “도자기를 만들 땐 보는 이와 만드는 사람의 거리감을 고려해야 한다”며 “만들 땐 작품의 30㎝ 앞에서 만들지만, 보는 사람은 1.8m 앞에서 관람하니까 도공 자신의 거리와 눈높이에 집착하면 안 된다”고 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조선 도공의 후예로 대대로 일본에 살면서, 선조의 가업과 이름까지 물려받는 삶의 무게란 어떤 것일까. 15대 심수관(63·일본명 오사코 가즈테루·大迫一輝)을 만나기 전부터 궁금했다. 그는 1598년 정유재란 때 전북 남원에서 왜군에게 붙잡혀 규슈 남쪽 가고시마로 끌려간 도공 심당길의 15세손이다. 심당길의 후손은 400년 넘게 도자기 명가의 맥을 이어오면서 사쓰마야키(薩摩燒·가고시마 도자기)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2대 심수관이 1873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 높이 2m 가까운 큰 화병(花甁)을 출품해 이름을 떨친 후부터, 후손들은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15대 심수관은 마흔 살 되던 1999년 ‘심수관’ 이름을 물려받았다. 날 때부터 결정된 운명 같지만, 가업을 잇기로 결심한 건 와세다대 교육학부 졸업을 앞둔 때였다. “기자가 되고 싶어 방송국 시험에 합격한 적도 있고, 일반 회사 면접도 본 적 있다. 무역업도 하고 싶었고, 학교 선생님도 되고 싶었다. 내게는 많은 가능성이 있었지만, 어머니가 가업을 잇기를 간곡히 원해 결국 도공이 됐다.”

아버지인 14대 심수관(1926~2019)은 그가 결정할 때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훗날 본인의 얘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초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의 아버지인 13대 심수관이 도자기 작업실로 불렀다. 아버지는 바늘을 꽂은 흙덩어리를 물레 가운데 올려놓고 돌렸다. 물레는 도는데 바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물레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심을 찾는 것이 앞으로 네 인생이다.” 14대 심수관은 이 말을 아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줬다. 무슨 뜻일까.

“조선 도공의 피와 기술을 이어받은 정체성을 지키며 살라는 뜻이기도 하고, 인생 자체도 그렇죠. 변화하는 것에 한눈팔지 말고, 움직이지 않는 걸 찾으라는 것. 한일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최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창립 10주년 행사 참석차 서울에 온 그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양국 관계가 악화될 때도 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한일 정부 간엔 체면이 중요하고 기업 간엔 이익이 중요하지만, 개인 사이는 이득이 없어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내 역할은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인, 일본을 사랑하는 한국인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서울공예박물관에서 만난 15대 심수관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다"며 "교토, 이탈리아, 한국으로 이어지는 도자기 유학 후 나이 마흔에 정식으로 '심수관' 이름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등대 같은 不動의 존재가 되어라”

-오사코 가즈테루라는 이름으로 40년을 살았다. 왜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나.

“어릴 땐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대학 졸업을 앞두고 현실적 문제로 다가왔다. 어머니가 간곡히 부탁하셨고, 흘러가는 대로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이어받기로 했다. 막상 도자기 굽는 일을 배워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아버지한테 직접 배웠나.

“부자지간에 뭔가를 가르치고 배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웃음) 와세다대 졸업 후 교토 도공고등기술전문학교를 다시 마쳤고, 이탈리아 국립미술도예학교에 3년간 유학했다. 한국에도 갔다. 상하좌우가 같은 대칭 구조의 장독에 반해 경기도 여주에서 옹기 만드는 법을 1년간 배웠다.”

-가업을 잇기가 무겁지는 않았나.

“그때는 나중에 후회하지 말자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그다음에는 훨씬 좋아질 거다, 그 생각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너는 등대가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등대라는 부동의 존재가 있어야만, 그 빛을 보는 자유로운 배가 스스로 정확한 위치를 알고 나아갈 수 있다고. 움직일 수 있는 배가 움직이지 않는 불편한 존재인 등대의 빛을 쓸데없는 물건이라고 무시하는 순간, 배는 헤매기 시작하고 마침내 좌초한다. 한일 관계에 ‘부동의 등대’가 되고 싶다.”

-지난해 4월부터 주(駐)가고시마 명예 총영사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은 당신에게 어떤 나라인가.

“한국은 사쓰마야키의 씨앗을 뿌린 아버지의 나라, 일본은 그 씨앗을 보듬고 키워낸 어머니의 나라다. 나는 한국이라는 혼을 가지고 일본이라는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들 마음 아니겠나.”

① 12대 심수관의 ‘다채색 금채 화초무늬 큰 병’(1892).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② 2018년 도쿄 한국문화원 특별전에 전시된 15대 심수관의 도자기. ③ 15대 심수관의 고양이 모양 향로. / 도쿄국립박물관·도쿄 한국문화원

◇한국 대통령과 맺은 인연

심수관 가문은 한국 대통령들과 인연이 깊다. 14대 심수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형제 같은 친분을 쌓았다. 1964년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그가 서울대에서 강연한 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박 대통령이 한국을 둘러본 소감을 묻자 그는 “일본 미술관과 박물관엔 칼과 창 같은 무기가 많은데 한국에는 별로 없더라”고 대답했다. 순간 눈을 번쩍인 대통령이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는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미(美)가 아니지요.” 나중에 이 말을 전해 듣고 감동한 일본의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가 박 대통령을 만나본 뒤 여러 매체에 그를 소개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 강연에서 14대 심수관이 한 말이 화제가 됐다.

“학생들에게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아버지는 말했다. ‘(일본이 저지른 죄가 크지만) 거기에만 얽매인다면 젊은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여러분이 (식민지 피지배)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도공의 후예로 살아온 370년을 말해야 한다’고. 일제의 악행은 기억하되, 고난에 언제까지나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더라.

“박정희 대통령이 아버지한테 우리 누님 한복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그때 큰딸 박근혜 대통령 사이즈를 재보고 맞췄다고 들었다. 누님과 박근혜 대통령 나이가 비슷해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이즈미 전 총리의 가고시마현 이부스키시(市) 정상회담 후에도 자리했는데.

“회담 후 차를 마시는 자리에 내가 참석했다. 노 대통령, 반기문 외교부 장관, 라종일 주일 대사 등이 있었는데 자리가 끝나고 모두 나갔는데도 노 대통령이 한참 신발 끈을 묶고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가 모시러 오자 노 대통령이 ‘한국에선 식사 후 신발 끈을 오래 매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돈을 낸다’고 농담을 했고, 두 분이 크게 웃었다.”

-노 대통령 내외가 미야마(美山)의 심수관요(窯)도 방문했다.

“차에서 내린 노 대통령 내외가 우리 마을의 산을 향해 머리 숙여 절을 했다. 그 산에는 우리가 400년 넘게 지키고 있는 단군 사당이 있고, 수많은 이름 없는 조선 도공의 묘지가 있다. 산을 향해 예를 표하는 대통령을 보면서 모든 사람이 고향에 돌아간 듯한 감동을 받았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한일의 중간에 끼여 살던 우리를 한일의 가교로 만들어준 순간이었다.”

15대 심수관이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는 모습. /심수관요 제공

◇아버지 이어 한일 가교 역할

심수관요는 2018년 도쿄의 한국문화원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53주년 기념 특별전을 열었다. 한일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로 임명받은 아버지 뒤를 이어, 15대 심수관도 양국 문화계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910년 경남 진해에서 일본 가고시마로 무단 반출됐던 망주석이 2009년 고향에 돌아오는 데 기여했다.

“가고시마의 난슈신사라는 절에 보관돼 있었다. 석물 표면에 ‘조선석 메이지(明治) 43년 8월 29일’이라고 적혀 있는 걸로 봐서,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것을 기념해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고향을 떠나온 것도 마음이 아픈데, 사람으로 치면 몸에 상처까지 난 거다. 나는 한국 문화재청, 도쿄 한국문화원의 환수 작업을 조금 거들었을 뿐이다. 물 한 컵을 바다에 부었다고 해서 바다가 불어났다고 얘기하면 바보겠지만, 그렇다고 불어나지 않았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물 한 잔을 바다에 넣었다는 행동 자체, 가슴 아픈 문화재가 고향에 돌아갔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특별전 때도 숨은 조력을 했다고 들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원래 ‘쌍둥이 불상’이라 부르는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교토 고류지(廣隆寺)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의 공동 전시를 추진했다. 고류지 주지 스님을 설득했지만, ‘불상은 신앙 대상이라 사찰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다’고 완강히 반대해 불발됐다. 언젠가 두 불상이 한 곳에서 만난다면, 서로 깜짝 놀라지 않을까. ‘엇, 우리 쌍둥이?’ 하면서(웃음).”

-한·일 관계가 지난 정권 때보다는 좋아질 거라는 기대가 있다.

“사실 지금도 나쁘지 않다. 어느 때보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잘 알고 있다. 정치가 최악이라고 해서 국민들 관계도 최악은 아니다. 비행기 위에서 보면 바다와 육지가 확실히 구분된다. 그런데 실제 가 보면 분명 바다였는데 육지로 바뀌는 지점이 있다. 한국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배를 타고 갔다. 큰 방에 한국 아주머니 6명이 타고 있었는데, 부산 사투리를 막 쓰다가 일본에 도착하니 하카타벤(후쿠오카 지역 사투리)을 쓰더라. 부산과 하카타를 왔다 갔다 장사하면서 자식 교육한 분들이다. 앞으로 양국의 중간 지점에 있는 존재들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될 거다.”

-16대 심수관은 결정됐나.

“아들 둘, 딸 하나인데 장남이 31세, 차남이 28세다. 둘 중 이 일에 더 적합한 아들에게 물려주자고 생각하다가, 최근에 장남이 물려받기로 결정을 내렸다.

-꼭 아들이어야 하나. ‘여자 심수관’도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이다. 제 딸은 전혀 관심이 없지만(웃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