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Marc Chagall 馬克·夏卡爾 (1887~1985)-Paysage de Paris-oil and tempera on canvas
by 주해2022. 11. 21.
2019-11-09 00:59:33
PROVENANCE
Galerie Maeght, ParisPrivate Collection, Asia
LITERATURE
The Hankook Ilbo, Magician of Color Chagall: 2010, p.116.Foundation Maeght, Rétrospective Marc Chagall:1984, p.147, pl.77.Foundation Maeght, L'univers d'aimé et Marguerite Maeght: 1982, p.86, pl.40.Moderna Museet, Marc Chagall: 1982, p.69, pl.86.Yomiuri Shimbun, Exposition Chagall: 1980, pl.P21.
EXHIBITED
Seoul, Seoul Museum of Art, Magician of Color Chagall: 2010.12.10-2011.3.27.Saint Paul de Vence, Foundation Maeght, Marc Chagall: Retrospective De L'Oeuvre Peint: 1984.7.7-10.15.Stockholm, Moderna Museet, Marc Chagall: 1982.9.25-12.5.
작품설명
러시아의 변방 비테브스크 Vitevsk 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마크 샤갈은 1910년 모더니즘 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첫발을 딛는다. 피카소, 마티스, 레제, 모딜리아니 등이 야수파, 입체파 등 아방가르드 미술을 꽃피우고 있던 그곳에서 샤갈은 몽파르나스 Montparnasse 에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작품생활을 해나갔다. 그러나 고향에 두고 온 연인 벨라를 향한 그리움은 파리를 떠나게 만들었고 곧 이은 1차 대전의발발로 1923년에서야 다시 그를 제2의 고향이 된 파리로돌아올 수 있었다. 샤갈은 벨라와 딸 이다와 행복한 가정을꾸리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지만 1941년 2차 대전의격전지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사랑이자 뮤즈인 벨라를 갑작스럽게 잃고 만다.샤갈을 수많은 근대미술의 거장들 중에서 차별화시키는 점은 모더니즘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어느 특정한 화풍을 따르지 않고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거의한 세기에 거치는 일생에서 샤갈은 뛰어난 색채 감각과 상징적인 도상들을 통하여 샤갈만이 할 수 있는 예술언어를창조하였다. 그의 작품에서는 사랑, 고향에 대한 추억, 유대교적 요소들이 연인, 서커스, 꽃, 풍경 등의 도상들을 통해샤갈만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90대 초반에 든 샤갈이 그려낸 출품작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작가의 원숙미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사이즈 면에서도 그의 대다수 작품들과는 달리 초기 러시아 시기에 그렸던 대작들과 같은 큰 사이즈로 그려져 그 가치를 배가시킨다.
고향 비테브스크를 배경으로 한 샤갈의 젊은 시절의 작품이 러시아의 추운 겨울을 반영한듯이 어둡거나 밤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았던 반면 1950년 프랑스 남부 생폴드방스 Saint Paul de Vence 로 자리를 잡은 이후 샤갈은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선명한 색채를 발견하게 된다. 가정적으로도 두 번째 부인 발렌타인, ‘바바’와 결혼하여 안정을 찾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작품도 이전의 작품과 다른 밝고 온화한 톤이 등장하게 된다.
샤갈이 즐겨 사용하였던 푸른 색은 출품작의 배경에서 흰색에 가까운 은은한 톤으로 바뀌어 작품 전체에 화사함을 부여한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처럼 파리의 풍경은 화면의 하단에 자리 잡고 있다. 세느 강의 다리와 그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풍경은 작품의 배경이 파리임을 한눈에 알아보게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위한 습작을 여러 점 그렸는데 메소나이트에 그려진 동명의 작품에서는 왼편에 그가 즐겨 그렸던 에펠탑이 있었으나 출품작에서는 군중의 모습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파리라는 배경을 좀 더 은유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인 듯하다. 노년의 작가에게 파리는 이제 격정적 사랑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조금 떨어져 여유를 가지고 관조할 수 있는 그리움의 장소가 된 듯하며 그 풍경의 중간에 떠다니는 연인을 배치하여 벨라와의 사랑을 회고하는 듯싶다. 연인은 모습은 작품 상단에도 다시 반복되어 사랑의 주제를 이어간다.
샤갈이 즐겨 그리는 서커스의 단원들, 공중그네를 타고 있는 곡예사, 당나귀에 서있는 반인반수의 곡예사, 유대교의 상징인 촛불을 든 남자 –습작의 이미지로 볼 때 광대로 볼수 있다- 가 화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팔레트를 든 화가의 자화상과 꽃다발을 든 여인의 모습도 보인다. 유년기 유랑 곡예단을 통해 처음 서커스를 접한 샤갈에게 서커스는 개인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나에게 서커스랑 세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마술쇼이다” 라는 샤갈의 말처럼 그는 열심히 해도 잘못하면 비난의 대상이 되고 뛰어나야 감탄의 대상이 되는 곡예사들의 모습에서 예술가 인생의 음영을 찾아보았다. 한편, 꽃은 샤갈의 후기 작품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소재로 프랑스 남부에서 발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상한다. 우측 상단에 그려진 마을은 샤갈 미술의 근간이 된 고향 비테브스크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도상들은 마치 중력이 없는 세상에 있는 듯 화면을 자유롭게 떠다니며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마치 마술 무대를 보는 듯한 극적인 효과를 얻게 한다. 전체적으로 밝고 부드러운 색채감 속에 빨강, 파랑, 초록, 오렌지, 노랑 등의 원색의 사용이 눈에 띄는데 이는 지중해의 풍경에서 발견한 강렬한 색채와 60년대 말부터 해온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의 영향으로 보인다. 샤갈은 후기 작품에 서 오일과 함께 아크릴이나 템페라를 재료로 사용하여 보다 쉽고 유연하게 색채를 표현하고자 하였는데 빨리 건조되는 템페라의 단점을 오일이 보완하여 색채가 더 밝고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색채의 사용이나 기법 면에서 달인의 경지에 달한 샤갈이 그려낸 출품작은 노화가의 일평생에 걸친 예술관과 열정이 한 화면에 응축된 보기 드문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마티스 사후 ‘색채가 어떤 것인지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화가는 샤갈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피카소의 말처럼 자유자재로 색채를 다루며 그 안에 인생과 사랑을 담아낸 샤갈의 예술혼을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