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0 10: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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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예술가들의 롤모델
시인 정지용과 화가 길진섭
길진섭이 장정한 정지용 시집 ‘백록담’(1941). /국립현대미술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정지용(1902~1950)의 시 ‘향수’의 첫 구절이다. 많은 이에게 이 시는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함께 부른 노래로 익숙할 것이다. 1920년대 지어진 이 시가 한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 1989년 이 노래 발표 이후였다. 바로 그 전해 납·월북 작가 해금 조치가 시행되면서, 오랫동안 잊힌 시인 정지용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 가수와 클래식 테너가 함께 노래를 부른 것도 신선한 시도였지만, ‘이렇게 좋은 우리말 가사가 있었나’ 하며 많은 이가 충격받았다.
◇'한국 현대 시의 아버지’ 정지용
정지용은 불과 25세 나이에 이 시를 ‘조선지광’(1927년 3월호)에 발표했다. 휘문고보 장학금을 받아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에서 유학하던 때였다. 이때 이미 그는 ‘카페 프란스’라는 멋지고도 서러운 시를 써서, 일본 시단의 좌장 기타하라 하쿠슈의 눈에 들었고, 당대 최고의 일본 문예지 ‘근대풍경’을 통해 등단한 뒤였다. 한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외국에서 알아준다고 하면 국내에서 난리가 나는 문화가 있는데, 20대 조선 시인 정지용도 그런 ‘스타’ 대접을 받았다. 특히 등단작 ‘카페 프란스’는 조선에서 예술 좀 한다 하는 이들이면 다들 암송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1935년 ‘정지용 시집’이 경성에서 출간되었을 때는, 1989년의 노래 ‘향수’ 신드롬만큼이나 당대 경성 지식인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화가 길진섭이 디자인한 '정지용 시집’(1935).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일부를 표지화로 삼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정지용은 후에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는 별칭까지 얻게 된다. 그는 아직 조선어 개발이 미흡하던 시절, 끊임없이 새로운 ‘우리말 시어’를 발굴하고 실험한 시인이었다. 우리가 한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면, 그 언어가 원래부터 당연하게 존재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처음 그 단어들을 채집하고 발굴하고 사용한 ‘선구자’는 있게 마련이다. 정지용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권위를 갖게 된 시인은 후배들을 길렀으니, 잡지 ‘카톨릭 청년’에 이상의 시를 처음 실어준 이도, 잡지 ‘문장’을 통해 박두진⋅조지훈⋅박목월 등을 등단시킨 이도 정지용이었다.
◇이중섭·김환기의 롤모델, 길진섭
1935년 출간된 ‘정지용 시집’, 그리고
년에 나온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백록담’은 아주 아름다운 책이었는데, 이 시집들은 모두 정지용의 친구 길진섭(1907~1975)이 디자인했다. 한 책은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중 천사 가브리엘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표지화로 삼았다. 다른 책은 ‘백록담(白鹿潭)’이라는 전설적인 이름에 걸맞게 ‘사슴’을 길진섭이 직접 앞뒷면에 그려 넣었다. 색감도, 단순한 형태감도 정말 정감이 가는 그림이다.
길진섭은 대중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한때 그는 ‘정지용의 친구’로 손색없는 문예계 핵심 인사였다. 후배 화가 김환기가 1944년 결혼식을 올렸을 때 ‘청첩인’으로 나란히 이름을 올린 이가 정지용과 길진섭이었다. 길진섭은 시인 이상이 1937년 도쿄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을 때 데스마스크(death mask·안면상)를 떠 준 인물이며, 시인 이육사의 유고집 ‘육사시집’을 장정한 화가였다. 근원 김용준과는 일본 유학 시절을 함께 보낸 절친이며, 후배 화가 이중섭⋅유영국 등의 자료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정 많은 선배였다. 정지용이 그랬던 것처럼 길진섭 또한 미술계 후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롤모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길진섭은 1907년 평양에서 길선주 목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길선주(1869-1935)는 삼일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고개마다 교회가 있었다는 평양의 ‘장대현’ 교회 목사였다. 세계에서 처음 새벽 기도회를 열었던, 기독교 부흥의 아이콘이다. 집안 내력으로 보자면 태어나자마자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었으나, 그러기에 길진섭은 지나치게 자유분방했다. 노래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당구도 잘 치고 술도 잘 마시고 연애담도 많은 길진섭. 그는 아마도 일찌감치 가족으로부터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것 같다.
길진섭, ‘자화상’, 1932/국립현대미술관
그가 1932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면서 그린 ‘자화상’을 보자.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눈을 치켜뜬, 반항기 가득한 얼굴! 그는 넥타이를 매도, 단추 하나를 풀어 느슨하고 삐딱했다. 도쿄 시내를 배경으로, 곱슬머리 휘날리며 찍은 화가의 사진 또한 그의 예술가적 기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는 졸업 후 귀국해서도 수시로 도쿄에 갔는데, 가끔은 단순히 술을 마시기 위해서였다고.
일본 유학시절 길진섭 사진, 1935. /국립현대미술관 김복기컬렉션
◇시대 앞선 두 선구자의 동행
정지용과 길진섭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선구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았다. 다음 세대 후배들이 시인으로, 화가로 자라날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몰이해 속에서 아무런 기반도 없이 출발해야 하는 선구자들 스스로는, 마치 떠다니는 부표처럼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떠돌기 마련이다. 기댈 언덕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징적 의미에서의 ‘고향’이 없는 것이다.
1940년 정지용과 길진섭은 함께 여행을 갔다. 한 신문사의 기획으로 선천⋅의주⋅평양 등 북방 지역을 다니면서 정지용은 글로, 길진섭은 그림으로 여행 기록을 신문에 연재한 적이 있다. 재밌는 장면은 이들이 함께 길진섭의 고향 평양을 방문했을 때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종교인이 되어야 할 운명을 거스르고 보헤미안 예술가가 된 길진섭은, 고향에 돌아가서도 카페 ‘라보엠’ 외에는 그다지 정착할 곳이 없다. 그저 산만하고 부산스럽게 평양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길진섭의 모습을 정지용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했다.
길진섭, ‘풍경’, 1930-4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평양에 내린 이후로는 내가 완전히 길(吉)을 따른다. 따른다기보다는 나를 일임해 버린다. 잘도 끌리어 돌아다닌다… 누구네 집 안방 같은 방 아루깐 보료 밑에 발을 잠시 녹였는가 하면, 국숫집 이층에 앉기도 하고, 낳고 자라고 살고 마침내 쫓기어난 동네라고 찾아가서는 소낙비 피해나가는 솔개처럼 휘이 돌아오기도 하고, 대동문턱까지 무슨 기대나 가진 사람같이 와락와락 걸어갔다가는 발도 멈추지 않고 홱 돌아서 온다.” <1940년 동아일보 ‘화문행각(畵文行脚)’ 중>
길진섭은 그립던 고향 동네에 가서 왜 솔개처럼 휘이 돌아 나오는 걸까? “종교 위에서 단죄했고, 사회적 모랄(윤리) 위에서 저울질했던” 어린 시절의 고향이 너무 미워서, 그는 고향을 보고 싶다가도 보기 싫은 걸까? 혹은 그 반대로, 너무 밉기 때문에 보고 싶은 걸까? “얼마나 미웁던 고향이기로 이제 내가 나른한 하품 속에서까지 고향을 그려보는고”라고 그는 썼다. <길진섭 ‘미운 고향’, 1941>
길진섭, ‘소녀’, 1940년대. 길진섭의 조카 길희영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작품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이런 애증(愛憎)에 기반을 둔 것인지는 몰라도, 길진섭이 남긴 몇 안 되는 풍경화는 하나같이 이중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쓸쓸하고 애잔하다. 색감을 과감하게 써서 울긋불긋 다채롭고 어여쁘지만, 별다를 것 없이 밋밋하기만 한 산과 강은 너무나 호젓해서 서글프기까지 하다.
정지용이 그리는 고향도 늘 그런 모습이었지 않나. 아련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시인은 그 풍경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결코 그 속으로 직접 뛰어들지 못한다. 그에게 고향은 늘 이미지 속에서만 존재한다. 어쩌면 그것이 시 ‘향수’의 본질이다. 한 평론가의 표현대로, 정지용의 시는 ‘갈 곳이 없는 회귀’를 노래한다. “가고 싶어. 따뜻한 화롯가를 찾아가고 싶어. 그러나 나는 찾아 돌아갈 데가 있을라구요?” <정지용 ‘황마차’ 중에서>
길진섭, ‘정물’, 1940./ 국립현대미술관
◇정박지 못 찾고 세상 떠난 두 선구자
정지용은 해방 후 모교인 휘문고보 교사를 그만두고 이화여대 교수로 취임했다. 1948년 출간된 윤동주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발문(跋文)을 써주기는 했지만, 해방 후에 오히려 더 시가 써지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사라졌다. 납북인지 월북인지 여러 설이 있지만, 확실해 보이는 것은 그가 1950년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48세였다.
길진섭도 해방 직후 창설된 서울대 미술대학 초대 교수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남산에 미술연구소를 세워 후진을 양성했는데, 다음 세대 화가인 서세옥이나 윤형근도 거기에 찾아간 적이 있다.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럴 수가 없었다. 1948년 전후 길진섭은 북으로 갔다. 원래 평양 사람이니까, 그는 ‘미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말해야 하나. 그는 북한에서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한때 대접받았지만, 말년의 행적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길진섭, ‘정물’, 1930-40년대
‘인생은 나그넷길’이라 ‘정박할 곳 없는 삶’이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높은 이상과 처절한 현실 사이 간극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인식했을 선구자들에게, 그들의 숙명은 더욱 냉엄한 것이었으리라. 많은 작품을 남기지도 못했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후세가 그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다.